매일신문

[야고부] 큰 어른, 두봉 주교

김교영 논설위원
김교영 논설위원

100세를 바라보는 가톨릭 사제가 꽹과리를 두드리며 덩실덩실 춤을 췄다. 자신의 사제 수품 70주년 기념 미사 뒤풀이였다. 농악대와 함께 신명 난 잔치가 벌어진 것이다. 지인에게 그날의 얘기를 들었다. 마음이 가득 차 올랐다. '안 봐도 유튜브'다. 소박하고, 소탈한 그는 그러고도 남는다.

화제의 인물은 초대 천주교안동교구장 두봉(94·세례명 레나토) 주교이다. 지난 7월 24일 경북 의성군 의성성당에서 두봉 주교의 사제 수품 70주년 감사 미사가 봉헌됐다. '기쁘고 떳떳하게'(안동교구 사명 선언문)는 두봉 주교가 즐겨 쓰는 말이다. 3년 전 안동의료원에서 두봉 주교를 만났다. 그는 코로나19 유행으로 고생하는 의료진을 격려했다. "환자를 돌보는 의료진은 성직자라고 생각합니다. 우러러봅니다. 힘든 일이지만, 신나게 기쁘게 멋지게 하시기 바랍니다." 꾸밈 없고 따뜻한 응원이었다. 그날 개신교 신자인 안동의료원장은 "제가 만나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예수님을 닮은 분"이라고 했다. 환난의 시대, 환한 말들이 오갔다.

프랑스 출신의 두봉 주교는 1953년 사제 수품을 했다. 이듬해 한국에 와서 사목 활동을 시작했다. 1969년 안동교구장을 맡아 21년간 교구를 이끌었다. 그는 '가난한 교회'를 내걸었다. 병들고 힘든 사람들을 도왔다. 한센병 환자를 위한 병원을 세웠고,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 창립을 지원했다.

'오원춘 사건'(1978년)은 두봉 주교와 떼려야 뗄 수 없다. 농민회 영양군 청기 분회장이던 오원춘 씨가 "군청이 감자 경작을 권장했지만, 종자가 불량해 싹이 나지 않는다"며 항의했다. 당국은 이를 묵살했으나, 안동교구 사제단이 농민 편을 들자 뒤늦게 보상했다. 이후 오 씨가 괴한들에게 납치됐다. 사제단은 진상 조사를 했다. 정부와 천주교가 대립하는 시국 사건으로 커졌다. 외무부는 두봉 주교에게 자진 출국을 요구했다. 두봉 주교는 바티칸에 가서 "어려운 사람을 걱정하고, 힘을 주고, 희망을 주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호소했다. 교황은 두봉의 손을 들어줬고, 한국 정부와 맞섰다. 이 사태는 10·26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면서 끝났다.

순진무구한 얼굴이지만, 신념은 강했다. 지역사회에서 큰 어른으로 존경받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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