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사람이 변하면

김동혁 소설가

김동혁 소설가
김동혁 소설가

어감부터 이미 꽉 막힌 느낌을 주는 '전형(典型)'이라는 단어가 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이 단어를 '본보기'의 의미로 흔히 이용한다. 예를 들면 '모범생의 전형', '미인의 전형', '전형적인 경상도 사람'처럼 말이다. 소설에서 말하는 전형적 인물도 현실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게 쓰이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하나 있다. 소설을 비롯한 대부분의 서사장르에서는 전형적인 인물을 크게 매력적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이런 예를 들어보자. 아주 냉혹한 킬러가 있다. 의뢰인에게서 입금만 되면 거리낌 없이 사람에게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인물…. 이 정도만 적어놔도 독자는 충분히 저 킬러에 대해 상상할 수 있다. 30대 초반에서 40대 중반 정도의 남자, 훤칠한 키에 '핏'이 아주 좋은 정장을 입고 근무(?)할 것이며, 정확하게 자신의 일을 마무리하고 말수가 극도로 적은 미남형 얼굴일 것이다. 바로 이렇게 쉽게 예상되는 인물이 작품의 끝까지 이 전형성을 유지한다면 과연 매력적일까?

앞서 말한 그 킬러를 다시 소환해 보자. 오늘도 살인을 의뢰받은 킬러는 정장을 차려입고 자신의 할 일을 위해 길을 나섰다. 누군가의 집 거실에서 한 여자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킬러. 이제 방아쇠를 당기면 그뿐. 그런데 거실 모퉁이 작은 테이블 뒤에서 6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킬러는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총을 거두고 홀연히 집밖으로 나가버렸다. 오늘 이 의뢰를 포기하면 엄청나게 곤혹스러운 일이 벌어질 줄 뻔히 알면서도 그는 묵묵히 제 갈 길을 간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수많은 킬러 주인공 영화의 시퀀스를 생각해 보라. 아저씨의 '원빈', 레옹, 존윅…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변하는 그 한순간에 지독한 시련은 시작되지 않는가?)

평소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킬러이지만 어떠어떠한 사정으로 인해 어린 아이 앞에서는 절대 살인을 하지 않는 그의 특징이 그를 매력적으로 만든다. 여기서 말하는 매력은 외모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나 관객의 반응을 잘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인물이 어떤 특정한 상황을 만나 자신의 특징을 드러내는 그 순간, 인물의 전형성은 깨진다. 대신 그 자리에 개성(個性)이 만들어지게 된다. 통상 주인공이라고 불리는 위치에 있는 인물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말하자면 한 인물이 시작부터 끝까지 같은 성격을 유지하면 큰 재미나 긴장감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변해서 매력적인 것은 어디까지나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현실 속 매력은 전형성을 넘어 산맥과도 같은 항상성(恒常性)에서 만들어지는 것 같다. 우리는 비록 지친 얼굴이지만 폭염이나 태풍 따위에 굴하지 않고 돈을 벌기 위해 출근을 한다. 두통이나 감기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하냐는 듯 '읏차'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가족들의 밥상을 차리고 빨래를 돌린다. 악착같이 돈을 모아 반짝이는 명품 가방을 사고, 조금 더 배기량이 높은 차를 뽑고, 뿌듯한 평수의 집을 장만한다. 해뜩해뜩 얼굴과 마음을 바꾸다가 평생 헤어나지 못할 늪 속에 자신을 가두는 소설 속 주인공보다 훨씬 매력적인 모습이며 태도이다. 마음의 시련이나 기억의 고통 따위를 가을바람에 쓸어 보낸 우리는, 오늘도 함부로 개성 따위는 만들지 않을 것이므로 결국 따뜻한 겨울을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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