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 미(美) 앞에서 무너지는 지성의 탑
토마스 만(Mann)은 현대 독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일 뿐 아니라 노벨상을 받은 세계 문학사의 거장이다. 그의 문학에 대한 이해와 평가는 1975년 이후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기에? 1955년에 죽은 만은 자신의 일기는 사후 20년 뒤에 공개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1975년에 그의 일기가 10권짜리 책으로 나왔을 때 독문학계는 충격에 빠졌다. 일기장 곳곳에 그의 동성애 취향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해서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하며 6명의 자식까지 낳은 만이 평생 동성에 대한 욕망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1975년 이후 만의 작품은 동성애란 현미경을 통해 재독되었다. 그전에도 눈썰미 좋은 이들은 심증을 토로했지만 물증이 없었다. 작가의 고백이 나옴에 따라 사람들이 찾아낸 가장 확실한 물증은 중편소설 「베니스에서의 죽음」이었다. 베니스에 여행을 간 초로의 남자가 미소년을 만나 정신없이 따라 다니다 죽는 이야기라면 말 다 하지 않았나. 그러나 이 소설은 동성애 코드만으로 수습되기에는 훨씬 복잡한 미학적 담론이 깔려 있다.
주인공 아센바흐는 50대의 저명한 독일 작가로 고도로 지적이고 정신적인 인물이다. 오로지 '이성과 의지'로 귀족 칭호까지 획득한 입지적 지성이다. 그는 작가일 뿐만 아니라 탁월한 논문을 쓴 학자다. 시간과 싸우며 사색하고 쓰느라 여행 같은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밖에 나갔다가 한 나그네를 보는데 불현듯 멀리 떠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힌다. 억눌렀던 '낭만적 동경'(Fernweh)이 분출한 것이다. 모든 것을 제쳐두고 베니스로 떠난다. 베니스는 자유와 낭만의 다른 이름이다. 놀랍게도 4주 후 아센바흐의 생은 이곳에서 끝난다. 의학적 사인은 콜레라이지만 자의에 가까운 미학적 죽음이다. 그 경위는 이렇다.
아센바흐는 베니스의 한 호텔에서 '신처럼 gottähnlich' 아름다운 인간을 목격한다. 가족과 여행 온 14세의 폴란드 소년이다. 대리석처럼 하얀 얼굴, 벌꿀 같은 머리, 반듯한 코, 매혹적인 입술, 고아한 표정… 아센바흐의 몸과 마음은 타지오라는 이 미소년에게 완전히 포획된다. 여기서 신처럼 아름답다는 것은 기독교와는 무관한, 그리스 신화를 염두에 둔 말이다. 나르시스, 에로스, 히아신스처럼 아름답다는 말이다. 물론 아센바흐가 그런 인물을 보았을 리는 없고 회화나 조각에 드러난 미적 형상들이다. 그러니까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서구 역사상 가장 완벽한 미를 구현했다는 그리스 예술에 대한 오마주다. 아센바흐는 그 남국의 아름다움에 혹하여 북구적 지성을 내팽개치고 목숨마저 돌보지 않는다.
베니스 시 당국은 숨겼지만 아센바흐는 도시에 전염병이 돌고 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눈치챘다. 그러나 그것은 '신적인 미'(타지오)를 보아버린 뒤였다. 그렇다고 14세 소년을 육체적으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은 아니다. 한없는 동경으로 가까이 가긴 하지만 언어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접촉하지는 않는다. 욕망이 없는 것은 아니나 소년은 성적 대상이라기보다는 거리를 두고 경탄해야 하는 예술미, 즉 히아신스나 나르시스의 미적 현현이다. 이 아름다움 앞에서 평생 쌓아 올린 지성과 위엄은 무력할 뿐이다. 콜레라를 피하기보다는 미동(美童)을 '영혼의 안내자'로 삼고 저승으로 떠난다. 실로 소년은 '미소 지으며 먼 약속의 땅을 가리키고' 그는 그 길을 따른다. 미학적 비극인가? 아니면 지성의 옥탑(獄塔)에서 해방되는 최선의 길이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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