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쓰레기? 누가 쓰레기인가

정경훈 논설위원
정경훈 논설위원

1930~1950년대 프랑스 좌파 지식분자들은 소련을 자본주의에서 세계를 구원할 희망으로 떠받들었다. 소련에서 가공할 국가 폭력이 자행되고 있음이 드러나도 이들은 "공산당의 죄악에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은 제국주의자의 도구가 되는 것"이라고 게거품을 물었다. 이런 자들에게 소련을 탈출해 참혹한 숙청과 학살, 굴라크(강제수용소)를 고발하는 사람이 어떻게 비쳤을까. '배신자'였을 것이다.

1949년 1월 24일에서 4월 4일까지 파리에서 열린 '빅토르 크라프첸코 재판'은 이를 잘 보여줬다. 크라프첸코는 소련 군수물품 구매위원회 소속으로 워싱턴에서 근무하다 1944년 4월 미국으로 망명한 뒤 1946년 회고록 '나는 자유를 선택했다'를 출간했고, 이듬해 5월 프랑스에서도 같은 제목으로 출간했다. 여기서 크라프첸코는 "스탈린 체제가 사회주의와 인륜을 배신했다"고 통렬히 고발했다.

프랑스 지식분자들은 기겁했다. 대응이 필요했다. 프랑스 공산당의 지식인 잡지 '레 레테르 프랑세즈'가 나서 "크라프첸코의 책은 미국 정보기관이 조작한 거짓말로 가득하다"고 비난했다. 이에 크라프첸코가 명예훼손으로 고소해 프랑스 전역의 관심 속에 재판이 열렸다. 재판에서 '레 레테르 프랑세즈'는 마리 퀴리의 사위로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장 프레데리크 퀴리오, 나치 점령기 레지스탕스 요원이었으며 파리근대미술관 관장인 장 카수 등 쟁쟁한 지식인들의 지원을 받았다. 그 요지는 '크라프첸코의 주장에 내포된 의미는 설령 진실이라고 해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궤변이었다. 크라프첸코는 승소했다. 하지만 판결은 매우 모욕적이었다. 배상금이 단돈 1프랑이었던 것이다.('포스트 워 1945~2005', 토니 주트)

국내 일부 좌파도 다르지 않다. 프랑스 좌파 지식분자들에게 크라프첸코 같은 사람이 '배신자'였듯이 이들에게 탈북민은 '변절자'이다. 좌파들이 '통일의 꽃'이라고 부른 전직 의원은 탈북 학생 면전에서 "이 변절자 XX들아"라고 했다고 하고, 2020년 한 의원은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의 대정부질문에 대해 "변절자의 발악"이라고 했다.

이런 모멸적 표현에 '쓰레기'가 추가됐다.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태 의원을 향해 "북한에서 쓰레기가 나왔어"라고 했다. "부역자" "빨갱이"라고 소리친 의원도 있었다. '쓰레기'는 1997년 망명한 황장엽 노동당 비서를 '인간 쓰레기'라고 한 이후 북한 당국과 관영 매체들이 탈북 인사들에게 어김없이 붙이는 수식어이다.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이 2016년 탈북했을 때도 '인간 쓰레기'라고 했다,

누가 쓰레기일까. 입만 열면 '민주' '인권'을 외치면서 북한 인권 문제 해결은 외면하는 민주당과 소속 의원들인가, 최악의 북한 인권 문제 해결 노력을 촉구하는 태 의원인가. '쓰레기' 욕을 한 의원은 북한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주사파가 주도한 전대협 부의장을 지냈다.

주체사상의 논리 구조는 간단하다. 인민 대중은 역사 창조의 주체이다→주체의 역할을 다하려면 옳은 지도를 받아야 한다→옳은 지도는 '사회 정치적 생명체의 중심이며 인민 대중의 의사를 체현한 최고의 뇌수(腦首)', 수령(首令)이 한다.('사회주의 건설의 력사적 교훈과 우리 당의 총로선', 1992년 1월 3일 김정일 연설). 한마디로 주체사상은 수령 1인 독재를 합리화한, 지독히도 기만적인 쓰레기 잡설(雜說)인 것이다. 이를 추종한 집단의 간부를 지낸 사람의 '쓰레기' 욕설이 평균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에게 어떻게 들릴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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