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5일 육군사관학교는 교내 충무관 앞에 설치된 이회영, 홍범도, 지청천, 김좌진, 이범석 선생의 흉상을 독립기념관으로 옮긴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이어 다시 홍범도 장군은 육군사관학교 밖으로, 나머지 네 분은 교내 다른 공간으로 이전한다고 당초 계획을 바꿨다.
그러나 이번 육사의 흉상 이전 조치를 둘러싸고 국내는 물론 나라 밖에서도 반대 여론이 드세다. 대구 지역 독립운동의 역사 정립에 노력하고 있는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 역시 흉상 이전 반대 입장을 밝힌다.
먼저, 홍 장군의 공적은 부인할 수 없다. 대한제국의 국권을 잃기 전인 후기 의병 당시 홍 장군은 의병을 결성해서 후치령 전투, 삼수성 전투, 갑산읍 전투 등을 포함하여 무려 60차례에 걸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빛나는 활동을 했다. 이후 홍범도는 러시아로 망명해 활동하며 안중근에게 영향을 주었고, 1910년 6월 류인석과 이범윤 등이 연해주 지역의 의병들을 망라한 13도의군 조직에도 기여했고, 1911년 5월 연해주 한인 사회의 주축인 권업회(勸業會)에서 회장 최재형에 이어 부회장에 선임됐다.
1919년 12월에는 대한독립군을 조직, 이듬해 6월 7일에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군, 안무의 대한국민회군, 김규면의 대한신민단과 함께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물리쳤다. 그해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지청천의 서로군정서 등과 합세해 청산리 대첩을 이끌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간도 참변으로 여러 독립군 단체와 러시아로 재차 망명했고, 자유시 참변과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를 겪으며, 홍범도의 항일 무장투쟁은 여기서 멈추게 됐다. 이후 그는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카자흐스탄에서 삶을 마쳤다.
이런 홍 장군을 육군사관학교가 냉대하는 이유는 대략 세 가지이다. 첫 번째는 1921년 발생한 자유시 참변 당시에 홍범도가 독립군 탄압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는 의혹이다. 두 번째는 홍 장군이 빨치산 부대를 이끌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자유시 참변 이후 홍범도 부대의 소비에트 적군 편입 개편과 홍범도의 대대장 임명 사실, 홍범도 장군의 1927년 소련 공산당 가입 활동 등이다.
이런 일들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의 미국 중심 진영과 소련 중심 공산주의 진영의 대결 구도인 냉전의 시각이 형성되기 전에 일어났다. 미국이 일본과 밀약으로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를 용인한 역사와 달리, 과거 소비에트 정부 지도자 레닌은 독립운동 지원을 위해 금화 200만 루블 제공을 약속하고 실제 금화 60만 루블을 지급했다.
아울러 홍 장군이 적군에 소속된 이후 어떠한 군사 활동을 전개했는지는 현재로서는 파악할 수 없다. 또한 공산당 가입은 소련 체제 안에서 살아남은 동지들과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소련 공산당의 도움이 필요해서 불가피하게 선택하였음을 감안해야 한다.
또 우리 국군이 대한제국 군대에서 의병, 독립군, 다시 광복군의 역사를 이었음을 국민들은 이해하고 있다. 육군사관학교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거쳐 신흥무관학교와 임시정부 육군무관학교 및 한국청년훈련반 등의 전통을 이어받은 간부 양성 학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 이전을 반대한다. 또 독립운동가의 흉상 이전 계획도 철회돼야 한다. 오히려 홍 장군 등 관련 독립운동가의 흉상을 추가로 제작해 육사 외 독립기념관 등 '적절한 장소'에 더 세울 것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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