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문환의 세계사] 아테네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 가짜 뉴스 자해(自害)정치

2천500년 전 가짜 뉴스 데자뷔, 한국 정치는 타산지석 삼아야
자해 가짜 뉴스·정략결혼·외국 용병…아테네의 독재자 페이시스트라토스
하르모디오스에 동성애 거절당한 히피아스 사랑 증오로 변해 복수극
아리스토케이톤과 시민 혁명 모의…판아테나이아 축제장 거사 실패로

구 파르테논 신전 터.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 히피아스 집권시기인 B.C 525년-B.C 520년 때 건축. B.C 480년 2차 페르시아 전쟁 때 파괴됐다. 왼쪽 건물은 B.C 438년 재건한 현재 파르테논 신전.
구 파르테논 신전 터.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 히피아스 집권시기인 B.C 525년-B.C 520년 때 건축. B.C 480년 2차 페르시아 전쟁 때 파괴됐다. 왼쪽 건물은 B.C 438년 재건한 현재 파르테논 신전.

초가을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던 9월. 그리스 역사에서는 B.C 490년 9월 10일로 기억한다. 장소는? 그리스 아테네 중심부 아고라에서 북동쪽 42.195km 지점 바닷가 마라톤(Marathon). 그렇다.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극한 스포츠 마라톤 발상지다. 아테네 시민병사 1만명과 근처 도시국가 플라타이아에 응원군 1천명이 진을 친 마라톤만(灣)에 850척의 페르시아 선박이 닻을 내렸다.

보병 2만5천명과 선원 등 페르시아인 10만여명이 쏟아져 나왔다. 밀티아데스 장군이 이끄는 아테네 연합군은 밀집대형 팔랑크스 전법으로 오랜 항해에 지친 페르시아 침략군을 물리쳤다. 헤로도투스는 『역사(Historia)』에 이렇게 적는다. "아테네 시민병사 192명, 플라타이아에군 11명, 페르시아 병사 6천4백명 사망,아테네 승리"

아테네 병사 페이디피데스. 마라톤 전투 승리 소식을 아테네에 전하고 쓰러져 숨을 거뒀다고 전해진다. 프랑스 화가 뤽 올리비에 메르송 작품. 아테네 고대 올림픽 스타디온 전시관에 사진으로 진열중이다.
아테네 병사 페이디피데스. 마라톤 전투 승리 소식을 아테네에 전하고 쓰러져 숨을 거뒀다고 전해진다. 프랑스 화가 뤽 올리비에 메르송 작품. 아테네 고대 올림픽 스타디온 전시관에 사진으로 진열중이다.

이때 시민 병사 한 명이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 이 놀랄만한 승리 소식을 전한 뒤, 장렬한 전사 아닌 전사자로 이름을 남긴다. 페이디피데스. 애국자가 있으면 매국노도 있는 법. 페르시아군을 인솔하고 온 인물은 80살 고령 히피아스. 20년 전 B.C510년 아테네에서 추방됐다가 적국의 앞잡이로 조국에 비수를 겨눴다.

그의 아버지는 자해 가짜 뉴스로 아테네 독재자가 된 인물이다. 한국 현대 정치에도 단식 같은 극단적인 자해정치나 가짜 뉴스로 국면 타개를 꾀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타산지석으로 고대 역사를 들춰본다.

나폴리만 산타루치아 항에서 바라본 베수비오 화산.
나폴리만 산타루치아 항에서 바라본 베수비오 화산.

◆나폴리 고고학박물관,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 조각

지구촌 3대 미항의 하나로 불리는 나폴리로 가보자. B.C 9세기 경 에게해 동남단의 로도스섬에 살던 그리스인들이 나폴리만으로 들어와 터전을 일궜다. 점차 거주지역을 넓혔고, B.C 6세기 네아 폴리스(Nea Polis, 새 도시)라는 이름 아래 세를 크게 떨쳤다. 오늘날 나폴리(Napoli)라는 이름의 기원이다.

이탈리아 반도 남부와 시칠리아 섬 그리스 식민도시들로 결성된 마그나 그라에키아(Magna Graecia, 대그리스연방)의 중심도시로 성장했다. 6백여년 뒤 서기 79년 나폴리만에 접한 베수비오산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켜 주변 지역을 화산재로 뒤덮어 버릴 줄이야... 나폴리 산타루치아 항에서 바라보면 폭발로 정상부가 푹 파인 베수비오 화산 모습이 2천여년 가까이 오롯하다. 그 자체로 절경이지만...

나폴리 민요 산타루치아를 흥얼거리며 항구에서 20분여 걸으면 과거 나폴리 왕국의 궁전이 나오고 여기서 다시 40분여 거리에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이 자리한다. 1748년부터 발굴이 시작된 폼페이와 근처 에르콜라노에서 발굴한 주옥같은 유물들이 고대 로마 문명상을 고스란히 되살려낸다.

고대 로마문명이 살아 숨쉬는 풍속화첩, 백과사전, 진열장 같은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2층에 귀한 인물 조각 2점이 탐방객을 반긴다. 대리석 조각의 주인공은 늠름한 젊은이 하르모디오스, 위엄있는 중년의 아리스토게이톤이다. 둘이 빚어내는 핑크빚 사연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무거운 정치 이야기로 들어간다. 조각은 로마시대 조각가의 손끝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원본은 B.C 510년 그리스 아르카이크 시기의 저명한 조각가 안테노르의 청동상이다. 이를 로마시대 대리석으로 복제한 것이다. B.C 510년이면 마라톤 전투에서 B.C 480년 조국의 등에 비수를 꽂으려던 히피아스가 아테네에서 추방된 해가 아닌가. 사연은 이렇다.

하르모디오스 조각상. B.C510년 만든 청동상을 로마시대 대리석으로 재제작.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하르모디오스 조각상. B.C510년 만든 청동상을 로마시대 대리석으로 재제작.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참주 가문을 몰아낸 민주주의 혁명

히피아스는 B.C 527년 아테네의 독재자이던 아버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죽으면서 권력을 이어받아 아테네 참주 자리에 올랐다. 히피아스에게는 동복 동생 히파르코스와 이복동생 이오폰, 헤게시스트라토스가 있었다. 헤게시스트라토스는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아르고스 출신 여인에게서 낳은 아들로 다혈질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헤게시스트라토스가 오만한 성격이라며 후한 점수를 주지 않았다.

B.C 528년 아버지 페이시스트라토스를 위해 어머니 고향 아르고스에서 용병 1천명을 데려와 아버지를 독재자 자리에 다시 앉혀준 효자(?)다. 그가 B.C 514년 치정사건에 얽혔다. 남성 동성애가 흠이 아니던 당시 헤게시스트라토스는 하르모디오스라는 늠름한 젊은이에게 연모의 정을 품었다. 하지만, 그의 연정(戀情)은 퇴짜 맞고, 시들었다. 사랑 뒤에 찾아오는 증오는 더 무섭다. 헤게시스트라토스는 졸렬하게 복수극을 펼친다.

아리스토게이톤 조각상. B.C 510년 만든 청동상을 로마시대 대리석으로 재제작.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아리스토게이톤 조각상. B.C 510년 만든 청동상을 로마시대 대리석으로 재제작.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하르모디오스의 흉을 보며 다닌 것은 기본. 아테나 여신에게 바치는 판아테나이아 제전에 하르모디오스의 여동생이 행진하는 영광을 누리지 못하도록 압력도 넣었다. 하르모디오스는 믿고 따르던 아리스토게이톤과 동지들을 모아 참주 가문을 몰아내고 아테네에 민주정치를 회복시키자고 다짐한다.

히피아스 가문을 처단하기로 정한 날 아침 판아테나이아 축제장. 참주 히피아스 옆자리에 거사를 모의한 동지 한 명이 사이좋게 나란히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이를 목격한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의 혁명세력은 밀고자가 생겨 거사가 누설된 것으로 판단했다. 늦기 전에 선수를 치자는 결정 아래 동지들이 미쳐 다 모이지 않은 상태에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섣부르게 행동에 들어갔다.

히피아스의 동복 동생 히파르코스를 죽이는데는 성공했지만, 그것으로 끝. 젊은 하르모디오스는 그 자리에서 반격을 받고 죽었다. 아리스토게이톤은 사로잡혀 모진 고문 속에 거짓 공모자 이름을 대고 생을 접었다. 살아남은 히피아스는 폭군으로 변해 복수의 칼날을 휘둘렀다. 공포정치 4년째 B.C 510년 망명중이던 민주인사 클레이스테네스가 스파르타 왕의 협력을 얻어 아테네에 입성했다.

아크로폴리스로 도망가 농성하던 히피아스 일족은 재산을 갖고 해외로 나간다는 조건에 합의한 뒤, 페르시아로 갔다. 민주주의를 되찾은 아테네 시민들은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의 의거를 기려 둘의 청동 조각상을 시내에 세웠다. .

페이시스트라토스 제단.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손자가 B.C520년 제작했다. 아테네 비문(epigraphy) 박물관
페이시스트라토스 제단.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손자가 B.C520년 제작했다. 아테네 비문(epigraphy) 박물관

◆페이시스트라토스, 자해 가짜뉴스로 지지자 규합해 독재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 옆에 부속 건물 비슷하게 비문(碑文, epigraphy) 박물관이 자리한다. 고대 그리스 역사를 수놓는 중요 사건 관련 비석이나 글자가 새겨진 유물을 전시중이다. 중국의 역사고도 서안에 있는 비림(碑林) 박물관과 닮은꼴이다. 이곳에서 큼직한 페이시스트라토스 제단을 볼 수 있다. 개인 제단 유물 가운데 가장 크다. 히피아스의 아들이 B.C 520년 경 아테네 행정관(Archon) 취임 기념으로 할아버지에게 봉헌한 기념물이다.

여기서 아테네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면 파르테논 신전과 마주한다. 아테네 수호여신 아테나를 기리는 신전이다. 이는 B.C 480년 2차 페르시아 전쟁 때 파괴된 것을 B.C 438년 재건한 거다. 원래는 그 옆에 히피아스 집권 시기 B.C 525년-B.C 520년 작은 규모로 지었다. 지금은 터만 남았다.

히피아스는 B.C 510년 이곳에서 농성하며 버티다 페르시아로 망명한 거다. 히피아스의 아버지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이곳에서 자해(自害) 가짜 뉴스쇼로 권력을 잡았다. 어떤 수작이었을까? B.C 560년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자신이 반대파에게 테러를 당했다는 거짓 소문을 퍼트렸다. 스스로 상처를 낸 자해(自害) 공작이었다.

시민병사 조각. 마라톤
시민병사 조각. 마라톤

아테네 시민 전사자 192명 현장 무덤. 마라톤
아테네 시민 전사자 192명 현장 무덤. 마라톤

다음 순서는? 경호를 빙자해 지지자들로 친위대를 만든 뒤, 민주주의를 외치는 민중을 강제 해산시키고 권력을 잡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도덕한 권모술수는 지속된다. 4년 뒤, B.C 556년 아테네 시민들이 페이시스트라토스를 내쫓았다. 그러자, 감언이설로 민주주의파 지도자 메가클레스의 딸과 결혼에 골인한다. 아테네 정치에 복귀해 다시 독재의 길을 걸었다. B.C 539년 아테네 시민들이 다시 내쫓자 아내와 이혼한다.

이어 B.C 528년 아르고스 용병 1천명으로 아테네 민중을 제압하고, 재집권한다. 자해 가짜뉴스, 정략결혼, 외국용병이라는 책략으로 민주주의를 무너트린 그를 아리스토텔레스가 호평한 것은 아이러니다. 독재자 페이시스트라토스 일족의 권모술수가 정체불명의 단식 자해와 가짜 뉴스 모략으로 어지러운 무궁화 금수강산에 어른거린다.

역사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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