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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원의 기록여행] 사라진 항구의 아가씨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8월 27일 자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8월 27일 자

'한때는 신명이 나서 힘껏 노래 부르던 젊은 어부들은 생명을 바쳐 사모하던 항구의 아가씨들도 가을 서리가 진 강남제비처럼 어느 곳에 갔는지…. 서글픈 이야기들 뿐이다. 대구에서 멸치 한 포에 1천200원 하는 것이 바다까지 나가 좀 값싸져야 하고 포항, 감포, 대포, 구룡포에서 값을 물으니 대구의 변함이 없고 도리어 대구보다 사기가 어렵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8월 27일 자)

항구의 아가씨들이 싹 사라졌다. 가을 서리가 내린 뒤 남쪽으로 떠난 강남제비처럼 말이다. 물고기가 많이 잡히고 해산물 수확이 많으면 어부들은 살맛이 났다. 주머니 사정이 좋아진 만큼 술집에서 인심을 쓰는 일이 잦았다. 이를 놓칠세라 부둣가 술집에는 불나방 같은 아가씨들이 찾아들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해방 이태째부터 포항이나 구룡포 바닷가 주점의 아가씨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젊은 어부들도 떠났다. 다 고기가 잡히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

고기가 잡히지 않는 흉어기는 해를 넘겼다. 어부들은 한류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오락가락하는 한류로 물고기가 동해를 떠나 서쪽 바다로 떠났다는 것이다. 고기가 없자 조상을 볼 면목이 없다는 한탄마저 터져 나왔다. 그 시절 조상을 기리는 제사는 중요한 의례였다. 일본 술인 정종이 물가 조사 대상에서 빠지지 않은 것은 제상에 오르는 필수품이었기 때문이었다. 수산업 경영자가 조상의 제사상에 청어 한 마리를 올리지 못해 얼굴을 들지 못했다는 소문이 퍼진 것도 이즈음이었다. 하물며 일반인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바다의 고기가 잡히지 않자 수산물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서민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멸치는 대구에서 1천 200원에 거래되었다. 쌀 반 말값을 넘어섰다. 당시는 수해의 영향으로 곡식값 역시 폭등해 쌀 한 말은 2천 원에 육박했다. 멸치의 평균 가격은 대구나 바닷가인 포항, 감포, 대포, 구룡포 등 어디서든 비슷했다. 바닷가에도 멸치가 잡히지 않으니 생산원가와 소비자 가격의 구분이 없었다.

흉어기가 길어지자 어민들은 빈털터리가 되어갔다. 의식주 자체가 위협을 받을 정도로 일상이 위태로웠다. 끼니를 때우려 해도 쌀이나 보리쌀을 구할 돈이 부족했다. 옷가지 하나를 장만하기도 버거웠다. 몸이 아파도 어쩔 수 없이 참았다. 물자 부족이 심한데다 돈마저 없으니 비참한 생활의 고달픔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 오죽했으면 농업으로 전업하겠다는 어부들이 나왔다. 하지만 이들의 전업은 이뤄지기 힘들었다. 농사지을 땅을 사거나 구해야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8월 28일 자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8월 28일 자

'경북의 수산업계는 작년 이래 자연의 환경과 어획 자금 자재 결무 등으로 만 일 년 이상의 긴 시일에 걸쳐 어업생산 그 위기는 전혀 성과를 얻지 못하였으며 이로 인해 쇠퇴일로를 밟고 있는 각 세민들의 실생활은 문자 그대로의 빈궁에 빠져버렸다. 특히 동해안 각 어업조합에서는 각각 조합원들의 추기 투망기의 자금알선 등에 큰 고통을 느끼게 하고 있다.' (남선경제신문 1948년 8월 28일 자)

식민지 조선의 어촌은 농촌과 다를 바 없이 살림이 변변치 못했다. 오막살이 집에다 부서진 배 조각으로 울타리를 친 어촌의 모습은 세민의 삶을 투영했다. 어민들은 주로 재래식 목선으로 고기잡이에 나섰다. 긴 시간 집을 떠나 고기잡이에 나서고 풍랑 등의 재해로 어민들의 희생 또한 수시로 발생했다.

이런 이유와 겹친 탓인지 그 시절 어부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직업군 중의 하나였다. 해방 이듬해 7월에 전국적으로 5만 척의 어선이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군정청 수산국에서는 총 4천만 원의 자금을 마련해 수산업자 개인에게 빌려주기로 했다. 어업을 그만두려는 어민들이 많아지자 이들을 달래기 위한 유인책의 일환이었다.

수산업계의 현실은 날이 가도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경북 동해안의 어민만 하더라도 흉어기가 이어지자 갈수록 빈곤의 수렁에 빠졌다. 경북수산업자들은 서울의 군정 당국을 찾아가 지원책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일제강점기 때보다 되레 지원책이 미흡하다는 인식이 깔려있었다.

일제는 어민과 농민의 착취기관이었던 금융조합을 통해 돈을 융자했다. 병 주고 약 주는 식이었다. 해방으로 착취기관의 횡포는 사라졌다. 덩달아 자금수혈 또한 막히고 말았다. 수산업 종사자의 70~80%에 이르는 영세 어민은 고리대금업자로부터 돈을 빌려야 했다.

흉어기에 시달리던 동해 어민들은 다행히 추석을 앞두고 화색이 돌았다. 갈치와 가을 꽁치(추도어) 떼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영일만에는 하루에 약 2천 600톤이 잡혔다. 시가로 약 150여만 원에 달했다. 항구를 떠났던 젊은 어부들과 아가씨들 또한 돌아올 법했다. 한류로 인한 수산물의 흉어기는 바닷물의 순환으로 자연스레 해소되었다. 살길이 캄캄했던 어민들은 한시름 놓았다. 바다로 버려지는 지금의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걱정과는 결이 달랐다.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박창원 계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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