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지워나간다. 욕망도, 좋고 싫음도, 나아가 나 자신도. 박항선(가명·49)씨는 지워진 18살의 자신을 떠올렸다. 수학여행을 앞둔 학교는 들뜬 분위기가 가득하다. 첫째 날엔 서울에 있다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빌딩에 가고, 그 다음 날엔 경주 불국사를 간다고 했다. 하나도 기대 안 된다. 원래 조용한 걸 좋아하니까, 수학여행 같이 시끄러운 건 절대 가기 싫다. 그렇게 말해도 엄마는 단체 생활인데 다녀오라고, 분명 즐거울 거라고 말했다. 엄마의 말이 맞았다. 육삼빌딩도, 석굴암에서 봤던 부처님도, 난생처음 먹어본 돈까스도 모두 좋았다. 이런 추억 없이 살아갈 뻔했다. 엄마에게 너무 고마웠다. 그래서 엄마가 아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 수학여행비를 마련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제 그 시절 자신처럼 18살이 된 아들이 "학원 같은 건 필요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말하며 방에 들어가 EBS 강의를 듣는 아들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본다. 아들은 얼마나 많은 것을 지워왔을까. 앞으로 얼마나 지워져야 할까. 미안한 마음에 또 눈물이 차올랐다.
◆아버지와 달라서 좋아했는데… 결혼하니 똑같이 술 먹고 친구 때문에 빚 져
항선 씨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가장 좋아하는 건 풍경화였다. 초등학생 때부터 혼자 스케치북과 색연필을 들고, 고향 집 뒤편에 있던 동산에 올라 하늘, 나무, 풀 같은 걸 그리곤 했다. 자연은 늘 말이 없다. 그래서 좋았다. 늘 술에 취해 엄마에게 고함치고, 집안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드는 아빠와는 달라서 좋았다. 미술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고등학생 때부터 집안 형편이 급격히 어려워져 꿈을 접어야 했다. 그 무렵 아빠가 친구 보증을 잘못 서주는 바람에 그간 운영해 왔던 작은 슈퍼도, 집도 모두 넘어가 버렸다.
또래들이 대학의 자유를 만끽하는 동안, 항선 씨는 20살에 바로 공장에 취직해 에어컨 부품을 조립하고 있었다. 그렇게 2년 뒤 지인 소개로 남편을 알게 됐다. 근처 사진관에서 사진 현상하는 일을 하는 5살 연상의 남자였다. 남편이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술을 마시지 않고, 담배도 안 피우고, 무엇보다 조용했다. 한마디로 아빠와는 정반대의 남자였던 것이다. 항선 씨는 24살에 그와 결혼했다. 남자 보는 눈이 별로였던 건지, 남편의 연기가 탁월했던 건지. 결혼식을 올리고 두 달이 지나니 남편은 담배를 피우고, 매일 술에 취해 돌아와 항선 씨에게 별 거 아닌 걸로 큰 소리를 치며 화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아빠가 했던 걸 똑같이 반복했다. 직장에선 그렇게 착하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사람이 집에 와선 폭군이 됐다. 그마저도 아빠와 똑같았다.
아빠와 닮은 점은 또 있었다. 아빠가 친구 보증을 서줬던 것처럼, 남편 또한 친구의 부탁에 못 이겨 은행에서 1천만원을 대출 받아 친구에게 빌려줬다. 친구는 돈을 갚지 않았다. 그 정도 당했으면 친구에 학을 뗄 만도 한데, 남편은 또 2천만원을 빌렸다. 친구의 꼬드김에 넘어가 사업을 하겠다고 빌린 돈이었다. 항선 씨는 극구 반대했지만, 남편은 다니던 직장도 그만뒀다. 그러다 사기를 당해 사업은 시작도 못 하고 2천만원을 고스란히 날렸다. 3천만원 빚이 순식간에 생겨났다. 월 이자 갚을 능력도 없던 남편은 6년 전쯤 신용불량자가 됐다.
◆세 아이 위해 더 힘내야 하는데… 무릎 인대 파열로 부업조차 힘든 몸 돼
이후 다시 직장을 구해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남편의 월급은 190만원 수준에서 늘 고만고만했다. 한곳에 오래 다니지 못하고 이 회사, 저 회사를 전전하는 바람에 월급이 오르지 못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항선 씨는 소영(가명·25), 지영(가명·24), 그리고 주호(가명·18) 삼 남매를 키워야 했다. 남편은 술자리에서 매번 늦게 돌아왔기 때문에, 연년생이었던 첫째와 둘째를 홀로 돌본다고 항선 씨가 애를 많이 먹었다. 하나만 안고 있으면 다른 하나가 시샘하며 자기도 안아 달라 칭얼댔기 때문에 하루 종일 두 아이를 앞뒤로 둘러업고 있어야 했다. 항선 씨는 이때 영향으로 10년 전부터 고질적으로 허리협착증을 앓고 있다. 허리 통증이 너무 심해 혼자 머리도 제대로 못 감고, 서서 설거지도 오래 못 한다.
남편이 미운 것과 별개로, 아이들은 너무 사랑스러웠다. 첫째는 자신처럼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각종 미술대회에서 상을 휩쓸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화가가 되고 싶어 했던 소영 씨는 미대 입학에 성공해 현재 미술 학원 강사로 일하고 있다. 항선 씨는 딸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밤 까는 일, 지갑형 티슈에 휴지 끼워 넣는 일, 전단지 붙이기 등 여러 부업을 섭렵하며 학원비를 벌었다. 지영 씨(24)도 대학교 졸업 후 취업 준비에 열심이고, 고등학교 2학년인 주호는 치과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공부하고 있다. 원래 주호는 기계공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항선 씨가 잇몸이 약해 왼쪽 위아래 각각 치아 3개가 전부 빠지는 바람에 오른쪽으로만 밥을 먹는 걸 보고 엄마를 치료해 주겠다며 꿈을 바꿨다.
기특한 아들을 위해 좀 더 버텨야 하는데, 건강이 따라주지 않는다. 항선 씨는 무릎 인대가 파열돼 지난 7월 수술을 받았다. 기초생활수급자라 할인이 돼 수술비로 190만원이 나왔지만, 그 돈이 없어 친오빠에게 빌려 겨우 완납했다. 한 달 동안은 목발을 짚고 생활하다 이제 슬슬 걷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목발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거동이 불편해 집안에서 화장실 한번 가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런 몸으론 청소도 쉽지 않아 집안은 몇 달 내내 엉망인 상태다. 무릎도 완전히 안 구부러져 재활 치료를 받아야 하지만, 가정을 돌볼 사람은 자신뿐인 상황에 재활에 쏟을 시간과 돈이 아까워 그러지도 못하고 있다.
병이 계속 추가되고 있다. 안 그래도 지난해 12월 건강검진에서 당뇨와 고지혈증이 있다는 걸 알게 돼 3월부터 병원에 다니던 중이었다. 이번에 인대 파열 수술 전 정형외과에서 심장 초음파 검사를 했는데, 의사는 심부전증 또한 의심된다며 대학병원에 가보라고 권했다. 대학병원 방문을 앞둔 지금, 여기서 상황이 더 나빠지는 건 아닐지 눈앞이 캄캄하다.
오늘도 아들의 방 침대에 누워 있는 항선 씨. 자신의 방엔 침대가 없어 아들이 외출했을 때만 아들의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한다. 이제 곧 아들이 돌아올 시간이다. 설거지도 하고, 식사 준비도 해야 한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뒤 주변 가구들을 징검다리처럼 짚으며 부엌으로 나온다. 부엌 식탁까지 다다랐을 때 너무 힘들어 식탁에 기대 잠시 숨을 골랐다. 아들을 위해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는데, 방에서 부엌으로 가는 것조차 힘겨운 이런 몸으로 뭘 할 수 있을지... 항선 씨는 그 자세로 오랫동안 멈춰선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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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성금내역]
◆베트남에서 행복 찾아 한국 왔으나 남편은 공장 사고 당해 못 움직이고 첫째는 신증후군, 둘째는 우울증 걸려 힘겨운 나날 보내고 있는 음유진 씨에게 3,104만원 전달
베트남에서 행복 찾아 한국으로 왔으나 남편은 공장 사고를 당해 못 움직이고 첫째는 신증후군, 둘째는 우울증 걸려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음유진 씨(매일신문 9월 5일자 10면)에게 3천104만8천392원을 전달했습니다.
이 성금엔 ▷무태골프 대표 여동윤 외 회원 및 직원일동 83만7천원 ▷(주)삼이시스템 10만원 ▷선진건설(주)(류시장) 1만5천원 ▷김동현 7만원 ▷김재용 7만원 ▷안현숙 5만원 ▷최종호 5만원 ▷권규돈 3만원 ▷이병규 2만5천원 ▷이윤정 2만5천원 ▷이현목 2만5천원 ▷신종욱 2만원 ▷최정원 1만5천원 ▷최지원 1만5천원 ▷김주현 1만원 ▷가지영 5천원 ▷김진혹 5천원 ▷'강민화(토니맘)' 5만원 ▷'조금이라도돕기' 700원이 더해졌습니다. 성금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가난 때문에 고등학교 중퇴하고 고기잡이·횟집·공사장 용역 등 전전하다 심장판막에 이상 생겨 3번 수술 받고 신장장애까지 겹쳐 10년간 혈액투석 중인 정지원 씨에게 2,184만원 성금
가난 때문에 고등학교 중퇴하고 고기잡이·횟집·공사장 용역 등 전전하다 심장판막에 이상 생겨 3번 수술 받고 신장장애까지 겹쳐 10년간 혈액투석 중인 정지원 씨(매일신문 9월 12일자 10면)에게 44개 단체, 122명의 독자가 2천184만3천360원을 보내주셨습니다. 성금을 보내주신 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에스엘(주) 200만원 ▷피에이치씨큰나무복지재단 200만원 ▷건화문화장학재단 150만원 ▷(주)대구은행 100만원 ▷(주)태원전기 50만원 ▷신라공업 50만원 ▷한라하우젠트 50만원 ▷㈜태린(양홍석) 40만원 ▷최상규이비인후과 40만원 ▷삼성기공(장태종) 30만원 ▷㈜신행건설(정영화) 30만원 ▷한미병원(신홍관) 30만원 ▷(주)동아티오엘 25만원 ▷㈜백년가게국제의료기 25만원 ▷금강엘이디제작소(신철범) 20만원 ▷대백선교문화재단 20만원 ▷대창공업사 20만원 ▷(주)구마이엔씨(임창길) 10만원 ▷(주)우주배관종합상사(김태룡) 10만원 ▷(주)이구팔육(김창화) 10만원 ▷경주천마자동차학원 10만원 ▷김영준치과의원 10만원 ▷대구동양자동차운전전문학원(최우진) 10만원 ▷세움종합건설(조득환) 10만원 ▷신성산업(주)(김용환) 10만원 ▷이재만 대구지방세무사회 회장 10만원 ▷창성정공(허만우) 10만원 ▷건천제일약국 5만원 ▷명EFC(권기섭) 5만원 ▷베드로안경원 5만원 ▷선남의원(김홍구) 5만원 ▷선진건설(주)(류시장) 5만원 ▷세무사박장덕사무소 5만원 ▷우리들한의원(박원경) 5만원 ▷이전호세무사 5만원 ▷전피부과의원(전의식) 5만원 ▷참한우소갈비집(신동애) 5만원 ▷채성기약국(채성기) 5만원 ▷칠곡한빛치과의원(김형섭) 5만원 ▷국선도풍각수련원 3만원 ▷매일신문구미형곡지국(방일철) 3만원 ▷청산(우창하) 3만원 ▷사단법인대한민국힐링문화진흥원 1만원 ▷하나회(김미라) 1만원
▷도경희 200만원 ▷김상태 이정추 각 100만원 ▷김진숙 음유진 각 50만원 ▷성현탁 이신덕 각 30만원 ▷박철기 이영석 각 20만원 ▷곽용 김순향 안소영 전시형 정은주 조득환 최창규 최한태 각 10만원 ▷도란향 백미화 변대석 서정오 신광련 안대용 윤기덕 이경자 이정애 이종하 임채숙 전우식 정원수 진국성 최상수 최영철 최종호 각 5만원 ▷방순옥 4만원 ▷나선희 3만3천원 ▷김태욱 김해숙 변현택 신장미 오영구 윤선희 이대성 이서연 이석우 이옥희 정유진 최춘희 각 3만원 ▷권오영 김우봉 남영희 서숙영 송재일 양명숙 여환주 이미선 이상노 이재민 이재열 이해수 정의관 정주현 천정창 각 2만원 ▷유명희 1만5천원 ▷강지원 권령경 권오현 권유진 김다영 김삼수 김성진 김순희 김진만 김태천 박인배 박진구 박홍선 배상영 백종열 석미혜 우순화 우철규 유귀녀 이아영 이영수 이원형 이정수 정서원 조영식 조인숙 지호열 최경철 한정화 허영재 각 1만원 ▷문민성 9천원 ▷방채원 5천148원 ▷오우정 이진기 각 5천원 ▷문민성 4천842원 ▷권두영 안기성 각 3천원 ▷이장윤 2천원 ▷이현주 최연준 각 1천원
▷'사랑나눔624' '이해인건강한심' '주님사랑' 각 10만원 ▷'불자정순화' '이상수박다영이예은' '재원수진' 각 5만원 ▷'(230618~230916)' 4만3천670원 ▷'석희석주' '힘내세요' 각 2만원 ▷'무진. 청안입니' '천혜원(청연화)' 각 1만5천원 ▷'지현이동환이' '청명(고나배정)' 각 1만원 ▷'좋은인연' 5천원 ▷'존경합니다' 3천원 ▷'지성이' '채영이' 각 2천원 ▷'조금이라도보태' 7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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