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의 요충지 경상북도 김천(金泉)은 백두대간 산줄기가 서남쪽으로 뻗으면서 황악산(1,111m)·삼도봉(1,177m)·대덕산(1,291m) 등을 기봉하고, 남으로는 수도산(1,317m), 동으로는 백마산(716m)·금오산(969m), 북으로 백운산(630m) 등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고산준령의 산들이 수많은 계곡을 만드니 예부터 산자수명(山紫水明)을 자랑하며 무수한 명현거유를 배출한 지역이다.
김천이란 지명은 '옛날 금이 많이 나고 금을 캐던 땅에서 물이 솟아 지어진 이름(금천이 후에는 김천이 된다)이라 전해온다. 김천 지역은 둥근 금성체의 산봉우리가 특히 많다. 김천이란 지명과 조선시대 김산군(金山郡)의 별호(別號)인 금릉(金陵)이란 지명도 이러한 형상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연안이씨 세거지 원터마을
경상남도 거창군과의 경계인 우두령에서 발원한 감천(甘川)과 황악산 동쪽 기슭에서 발원한 하원천(下院川)이 합수되는 지점에 자리 잡은 구성면((龜城面) 상원리(上院里) 원터(院基) 마을은 옛날 상좌원이란 관영 숙소가 있던 곳이라 마을 이름을 원터라고 부르며, 상원(上院)은 상좌원의 위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원터마을이 형성된 것은 이말정의 아들이며 형조판서를 지낸 정양공(靖襄公) 이숙기(李淑琦·1429~1489))의 차남인 진사 이세칙(李世則)이 원터에 정착해 마을을 개척한 후 대대로 연안이씨 집성촌을 이루어왔다.
김천 지역에 연안이씨들이 세거하게 된 것은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이말정(李末丁·1395~1461)이 낙향하면서 부터이다. 이말정은 조선 전기의 문인·학자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평절공(平節公) 한옹(韓雍)의 사위가 되어 그 문하에서 수학했다. 1426년(세종 8) 사마시에 합격한 이래 출중한 학문과 높은 덕이 널리 알려져 충청도 도사(都事), 예빈시소윤(禮賓侍少尹)을 역임하였다. 1446년(세종 28) 전후에 관직을 버리고 김천 구성면 지품(知品)으로 낙향하였다.
지품에 내려온 얼마 뒤에 감천이 범람하여 가옥과 전답이 침수되자 식솔을 거느리고 거창군 모곡(茅谷·현 거창읍 서변리)으로 이사하였다. 그 후 이말정이 거창 모곡에서 지품으로 돌아와 1461년(세조 7) 별세하자 자손들이 그의 묘를 상원리 후곡(後谷)인 매봉산 조산골 아래에 썼다. 이곳이 금채낙지형(金釵落地形) 명당으로 조선 8대 명당 중 하나로 알려진 곳이다.
금채낙지형이란 금비녀가 땅에 떨어진 형국을 말한다. 혈(穴)은 금비녀의 장식품 수술 자리에 맺혔다. 이러한 형상을 풍수에서는 겸채혈(鉗釵穴)이라 한다. 좌향은 신좌을향(辛坐乙向)으로 '신(辛)은 보석이나 금비녀 등을 상징하니 좌(坐)와 형상이 이치에 부합한다. 안산(案山)은 금비녀에 어울리는 옥소(玉梳·머리를 빗는 빗)이다.
이곳에는 상단에 배(配) 곡산한씨(谷山韓氏) 아래에 부원군 묘소가 있다(妣上考下). 그런데 묘소 위치가 후손들 묘소보다 아래쪽에 있어 풍수에서 말하는 역장(逆葬)의 형태이다. 이런 역장은 일반적으로 기피하는 현상이다. 그런데 연안이씨 묘소는 역장을 해서 오히려 화를 면했다고 한다.

◆8명 판서와 12명 목사 배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면서 명당이 많은 조선에서 큰 인물이 나는 것을 막아볼 계책으로 명나라 군사들이 건널 압록강 임시다리를 명당 묘의 관(棺)으로 이어 만들라는 무리한 요구를 했다는 것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전국의 명당 묘를 파헤쳐 관을 공출해 갔는데 부원군의 묘는 역장인지라 명당에 들지 못한다고 하여 묘가 파헤쳐지는 수난을 면했다고 하는 설화가 전해진다.
부원군은 곡산한씨와의 사이에 5남 1녀를 두었는데 5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하고 관직에 진출하였다. 장남 숙황(淑璜)은 성균관 직강(直講), 차남 숙형(淑珩)은 감찰(監察), 삼남 숙규(淑珪)는 현령(縣令), 사남 정양공 숙기(淑琦)는 1453년(단종 1)에 무과 급제하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면서 원종공신 2등에, 이시애의 난 때 공을 세워 적개공신 1등에 책록 되었으며 그 공으로 이조참판에 올라 연안군에 봉해졌다. 이후 형조판서와 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오남 문장공(文狀公) 숙함(淑瑊)은 이조참판과 홍문관 부제학을 지냈다.
이숙기가 적개공신(敵愾功臣)에 녹훈됨에 따라 이말정은 연성부원군에 봉해졌다. 부원군은 자제들을 훌륭히 훈육해 나라의 동량으로 삼았고 가문을 크게 번성시켜 후손 중에서 8명의 판서(判書)와 12명의 목사(牧使)를 배출하며 이 고장을 대표하는 명문가의 반열에 오르도록 하였다.

손자 대에 가서는 장손인 숙황의 후손들이 두각을 나타내었다. 특히 연안이씨 군위 입향조인 숙황의 둘째 아들 갑산교수 이형례(李亨禮)의 후손들이 번성하였다. 이형례의 둘째 아들인 이국주(李國柱)가 이숙기의 장자인 이세범(李世範)에게 출계하는데 이국주의 아들인 예조참판을 역임한 이우민(李友閔), 대제학과 좌찬성을 역임한 이호민(李好閔), 한성판윤을 역임한 손자 이경엄(李景嚴)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형례 묘소가 명당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군위읍 외량리 오지산(五指山)에 있는 이형례 묘소의 역량을 확인해 본다. 이곳은 형기적으로 대명당의 국세를 갖춘 품(品)자 형의 대명당이다. 묘소의 청룡방에 있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을 배출한 묘소로 알려진 사위 류공작(柳公綽)의 묘소 못지않게 좋은 자리이다. 정승이 나올 수 있는 기운을 가진 자리이기는 하나 점혈이 아쉽다.
결론적으로 연안이씨의 번성은 금채낙지형 명당인 부원군 부부 묘소와 더불어 갑산교수 이형례 부부의 음택 명당기운이 어우러져 나타난 결과로 보인다.


◆ 최씨의 절개를 칭송해 연못을 최씨담
원터마을은 감천과 하원천이 합수되는 안쪽에 자리하여 멀리서 보면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형국인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다. 이 마을의 핵심 혈처에는 보물 제2047호로 지정된 방초정(芳草亭)이 있다. 자리는 새하얀 연꽃이 물위에 떠있는 형상으로 해좌사향(亥坐巳向)의 명당이다.
이 정자는 1625년(인조 3년) 이정복(李廷馥·1575~1637)이 자신의 호(號)를 따서 방초정이라 하였고 원래 자리보다 감천 쪽으로 더 가깝게 지었다가 1736년 감천의 범람으로 유실되자 1788년 후손 이의조(李宜朝)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 새로 건립하였다. 정자를 건립한 이정복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년) 양천 하로의 17살 난 화순최씨와 혼인을 했는데 신행(新行)길에 왜병을 만났고 이때 정절을 지키고자 화순최씨가 못에 투신했다는 것이다.

이후 사람들은 최씨의 절개를 칭송하며 연못을 최씨담(崔氏潭)이라 불렀고 남편 이정복은 갸륵한 아내를 그리워하며 훗날 부인이 몸을 던진 연못 옆에 자신의 호를 딴 방초정을 지었다고 한다. 또 화순최씨를 따라 함께 투신한 종 석이(石伊)의 비석이 1975년 연못 준설공사 중에 발견되어 주인의 정려각 옆에 세워졌다. 배우자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주인에 대한 충심이 가슴을 아련하게 한다.

풍수가·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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