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를 그린 무채색의 그림인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그림이 아니다.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낸 형상이다. 물처럼 일렁이는 빛이 회화와는 다른 느낌을 자아내며,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형상으로 변화한다.
이상민 작가(중앙대 미술학부 교수)는 판유리의 뒷면을 음각으로 연마하는 작업인 '기(器)' 시리즈를 이어오고 있다. 유리를 깎아낸 부분에 빛이 투과하며 그림자와 함께 작품을 만들어낸다.
회화와 부조, 조각이 혼재된 듯한 그만의 독특한 작품은 마치 수도승과 같은 작업을 통해 탄생하는 섬세함과 고뇌의 집약체다. 작품의 첫 인상은 고요하고 정적이지만 그 속에는 유릿조각이 날리고 귀를 찢는 듯한 그라인더 소리가 가득한, 지난한 작업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1㎝ 두께의 고강도 유리를 다이아몬드날 그라인더로 깎아냅니다. 빛을 비춰보고 원하는 형상이 나올 때까지 수십㎏의 유리를 계속해서 들었다 놓으며 조금씩 깎는데, 1㎜만 더 깎아도 형상이 크게 달라지기에 아주 섬세한 작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최소한으로 남기는 두께는 고작 2㎜. 그는 8㎜ 속에서 오로지 감각만으로 음양을 주고 형상을 찾아낸다. 두께마다 다른 미세한 소리를 듣기 위해 작업용 귀마개도 착용하지 않는다.
작가는 "그라인더 속도가 무척 빠른데, 그 속도와 타협하면 원하는 형상이 나오지 않는다"며 "깎아낼 때 소리가 고주파여서 계속 귓가에 남아있는 듯한 느낌이 들고, 청력에도 좋지 않은 걸 알지만 그라인더를 섬세하게 다루기 위해 온몸의 감각을 동원해 작업한다"고 말했다.
그가 유리 음각을 통해 나타내는 형상은 매병이나 주병, 다완 등의 그릇이다. 어느날 대만에서 본 전시에서 그릇에 대한 아름다움을 느낀 이후, 그 형체를 차용해 구현하는 노력을 이어왔다.
하지만 그가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형상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형상은 빛의 방향과 굴절에 따라 얼마든지 변하고, 관람객들은 의도치 않은 새로운 시공간을 경험하며 사물의 보이지 않는 진실이 존재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그는 작품을 통해 우리가 고정된 개념으로 바라보는 것들이 얼마든지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동시에, 사물이 담고 있는 정서나 기억 등 형상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보이는 것의 재현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을 나타내는 게 예술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며 "매번 소재는 다르지만 냄새나 파장 등 비물질적인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작업을 해왔다"고 말했다.
그의 작업은 비슷한 작품을 찾아보기 힘들만큼 독창적이고, 독보적이다. 그는 '유리 조각을 다루는 사람'으로서, 앞으로도 소재에 대한 연구와 새로운 시도를 끊임 없이 해나가겠다고 강조했다.
"불투명한 것은 빤하고 지루하잖아요. 유리처럼 투명한 것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고, 확장 가능성도 큽니다. 질리지 않는 그 투명의 매력에 빠진 것 같아요. 앞으로 해야 할 숙제들도 무궁무진합니다."
그의 작품 20여 점을 볼 수 있는 개인전 '사물의 보이지 않는 진실'은 10월 14일까지 갤러리전(대구 수성구 달구벌대로 2811)에서 열린다. 053-791-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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