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강쇠 점 찍고, 조씨고아'를 돌아온 서울시극단 고선웅의 <카르멘>
서울시립극단 고선웅의 <카르멘>은 오페라로 알려진 <카르멘>을 연극으로 만든 작품이다. 재미, 웃음, 감동과 비극성의 조미료가 적절하게 뿌려진 레시피를 보면 역시 연극 연출가 고선웅이다. 창극을 현대화한 <변강쇠 점 찍고 옹녀>(2015)를 공연할 때 이야기다. 한 일간지 연극 담당 기자는 리뷰를 쓰며 "원작 비틀기의 대가, 웃음줬다 눈물주는 연출가"라고 평했고 그의 연출력에 대해 "웃음 요소를 넣어 극을 경쾌하고 밝게 끌고 가지만 극이 담고 있는 비극성이나 주제는 잃지 않는 균형 감각을 지녔다"고 적었다. 그 뒤 중국 고전의 4대 비극 중 하나로 꼽히는 기군상 원작 <조씨고아>를 각색·연출한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으로 정점(頂點)의 연출력을 보여주었을 때 고선웅 연출은 고전의 현대화에 있어 대중성과 예술성을 아우르는 대가가 되어 있었다. 연극 담당 기자의 분석이 날카로웠던 셈이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연극성이 강하면서도 대중적인 중독성이 있다. 송대관의 네 박자 가사처럼 "쿵짝 쿵짝 쿵짜자 쿵짝 네 박자 속에,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고 눈물도.." 있었다. 한 구절 한 고비 꺾어 넘을 때 우리네 사연을 담아내는 울고 웃은 연극 같은 인생사는 고선웅 연출의 네 박자로 무대에서 소리를 내며 연극계에서는 흔치 않은 고선웅의 신드롬을 만들었고 그는 스타 연출가가 되었다. 이후 <낙타상자>, <회란기>를 공연하며 고선웅은 중국 고전의 3대 작품 <조씨고아>, <낙타 상자>, <회란기>를 모두 섭렵하며 고전 희곡을 조련하는 경지(境地)를 보여주었다. 고전을 조련하는 그의 기술은 상상력으로 확장되고 연출 특유의 놀이성을 바탕으로 질주하는 배우와 무대 공간은 웃음으로 승부수를 띄우며, 흑백 TV드라마처럼 투박한데도 현대적인 컬러 감각을 드러낸다.
무대라는 시공간의 특수성, 연기의 기술을 돋보이려 첨단 무대 기술과 기교(技巧)를 부리지 않고도 중국 고전의 흑백 서사를 정확한 메시지로 타격하는 연출과 신호에 따라 극 중 인물로 분한 배우들은 극의 균형 감각을 유지하며 웃음 코드를 살려낸다. 이는 고선웅의 작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경험이다. 서사의 리듬과 템포를 유지하며 무대에서 전력 질주를 다 하는 배우들은 절묘한 타이밍과 박자 넣기로 완급을 조절해 고전을 동시대의 작품으로 살아나게 한다. 고선웅이 서울시극단 예술단장으로 선임된 후 마샤 노먼의 <겟팅 아웃>을 공연할 때만 해도 "왜 이 작품을 할까. 뒤집을 만한 것이 없을 텐데" 라고 했는데, 신선한 해석과 무대는 고선웅만의 <겟팅 아웃>을 만들어냈다. 김기란 연극평론가는 '오늘의 서울연극' 공연 리뷰를 통해 "<겟팅 아웃>은 장인의 손맛으로 가능한, 섬세하고 완성도 높은 공연으로 구현되었고, 고선웅이 이전에 보여준 탈환영적 개방 구조의 무대들이 이와 같은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가능할 수 있었음을 동시에 증명했다"고 평가했다. 2023 서울시극단 세 번째 시즌 공연인 <카르멘>(각색·연출 고선웅, 드라마터그 최여정, 음악 연주 박성진, 안무 이혜정, 세종문회회관 M시어터)도 고전적 치정멜로극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살려 플라멩코와 라이브 음악,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로 오페라보다 더 뜨거운 '카르멘'의 불길로 감동의 화구를 달구어 냈다.
◆연극성 강한 네 박자에 재미, 웃음, 감동과 비극성이 다 들어있네
오페라로 유명한 <카르멘>은 연극으로 승부수를 걸기에는 만만치 않은 도전이다. 중독성 강한 오페라 음악을 거세하고 극 중 대사와 플라멩코 춤과 타악의 리듬, 등장인물의 캐릭터, 극적인 서사로만 연극적인 카르멘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해 보일 수 있지만, 고선웅 연출의 네 박자(재미, 웃음, 감동, 비극성)의 레시피는 이번 작품에서도 음악적인 역할을 충분하게 해내고 있다. 배우들의 대사로만 감정의 전류를 일으키는데도 뜨끈뜨끈하다. 공연은 오페라와 동일한 1820년대의 스페인 세비야(세빌리아)의 담배공장 인근 한 부대 앞 광장에서부터 시작된다. 연극 무대의 설정은 일종의 약속인 만큼 무대 공간이 거리가 되고 광장이 되어도 사실감이 낮다며 시비 걸 사람이 없다. 이런 연극의 특성을 무대로 고선웅은 잘 버무린다. 18세기부터 세비야 광장에는 스페인 최대의 담배공장이 있었고 당시 집시들은 노동자였다. 주변으로는 군인(수비대)들이 경비를 서기도 했는데 이러한 내용을 무대배경으로 그대로 살렸다. 이번 공연에서는 투우장과 흡사해 보이는 원반형 경사 무대가 눈길을 끌었다. 무대 중앙 원반형 주공간은 중심적인 장면과 극을 쏟아내고 외각, 상하좌우로 배우들이 무대를 전진하며 공연 100분을 30분 이내로 돌파하는 감각을 보여주었다. 이 무대는 담배공장, 집시들의 거주지역, 투우장, 군대의 내외부로 변주되며 공간에 속도감 있는 변화를 주었다. 원반형 외곽은 광장, 거리, 길가의 공간이 된다. <카르멘>의 스토리는 오페라 원작과 동일하다.
입대한 돈 호세(김병희 분)를 약혼자 미카엘라(최나라 분)가 편지를 들고 세비야로 찾아오고 남자들은 집시여인 카르멘을 향해 뜨거운 구애를 한다. 남성 편력이 심한 카르멘(서지우 분)의 가슴을 녹여낸 남자는 자유분방한 여자들을 싫어하던 순진한 군인 돈 호세다. 카르멘의 뜨거운 유혹의 신호에 돈 호세도 카르멘의 남자가 되고 카르멘을 사이에 두고 치정(癡情)으로 얽힌 비극이 시작된다. 배우들의 연기와 플라멩코의 앙상블이 음악적 리듬을 형성하는데 오페라 이상이다. 초반부터 집시들의 삶을 고선웅다운 '아제' 웃음으로 극과 장면 사이로 밀어 넣고, 설렁설렁 웃음을 터트리면서도 계산적인 장면은 날카롭고 단단하다. 웃음 뒤에 장면이 흔들릴 수 있는데도 극적인 박자가 결말의 결승점까지 척척, 탁탁 맞는다. 카르멘의 비극성을 웃음으로 반전시키고 고선웅 무대에서 감동을 일으키는 마지막 한방은 예외 없이 <카르멘>에서도 홈런을 친다. 카르멘을 향해 구애하는 남자들과 투우사의 뜨거운 노래처럼 에스까미오(강신구 분)의 연기는 오페라 음악을 대신할 만큼 질주한다. 카르멘을 대신해 감옥에 갇힌 돈 호세와 카르멘의 탈출, 배신의 절망감에 죽음을 선택하는 미카엘라는 한 남자만을 사랑하는 청순한 여인이다.
1막은 미카엘라와 돈 호세를 중심으로 흐르면서도 카르멘한테 푹 빠져 있는 희극적이면서도 바람둥이 경비대장 즈니가(최진영 분)의 전령이 된 돈 호세를 향한 카르멘의 유혹은 플라멩코로 사랑의 전류를 일으킨다. 돈 호세와 카르멘의 비극적 미래를 예언하는 당카이레(김신기 분)의 카드 점술은 이들의 운명을 갈라놓는다. 담배공장 앞 광장에서 담배공장 여공과 카르멘의 싸움이 일어나고 이 사건으로 카르멘과 돈 호세는 만나게 된다. 포승줄에 묶여 감옥으로 향하면서도 돈 호세를 향한 카르멘의 뜨거운 유혹은 이어지는데, 돈 호세 입에서 "파스티아로 가. 단 약속해줘. 내 사랑을 받아주겠다고." 라는 말이 터져 나온다. 감옥으로 호송되는 카르멘이 언덕으로 도망갈 수 있도록 협력자가 되어버린 돈 호세가 카르멘을 대신해 감방에 갇혀 버리면서 고선웅의 멜로는 2막부터 치정(癡情)으로 달린다. 2막에서 감방에 갇혔으면서도 카르멘의 남자가 되어버린 돈 호세는 미카엘라를 향해 차가운 변심을 드러내고 즈니가, 투우사 에스까미오 등 카르멘을 향한 복잡한 구애들이 섞이며 플라멩코는 이들의 뜨거운 내면을 드러내는 무언의 언어가 된다. 2막의 무대는 집시, 투우사, 카르멘의 격렬한 플라멩코가 뜨거운 전류를 형성하고 카르멘의 전남편이자 집시들의 우두머리 밀수꾼인 가르시아(장재호 분)가 돌아오면서 극은 긴장감이 높아진다. 카르멘을 건드리지 말라는 경비대장 즈니가를 향해 돈 호세는 우발적으로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고 꿈틀거리는 즈니가를 향해 가르시아가 마무리 한 방을 쏘면서 2막의 복잡한 치정은 죽음과 살인으로 이어지게 된다.
◆웃음으로 조미료를 뿌리고, 마무리는 비극성으로 돌려차는 <카르멘>
3막은 쫓기는 신세가 된 돈 호세, 카르멘, 가르시아와 밀수꾼들 사이에 등장한 미카엘라의 이야기가 더해진다. "재미로 던져준 아카시아. 아이들 장난 같은 즐거운 놀이인데? 사내들 꼬실 때 쓰는 닳고 닳은 방법. 당신은 카르멘을 너무 몰라 지루한 옛날이야기는 잊어줘!" 카르멘의 변심과 가르시아의 숨통을 끊어 놓는 돈 호세의 이야기가 속도감 있게 전환될 즈음, 미카엘라는 자살을 선택한다. 마지막 장면까지 고선웅의 <카르멘>은 밀도 있는 장면을 배치하며 긴장감을 유지하고 달린다. "어, 좀 느슨한데" 장면과 장면 사이가 불안하게 느껴졌는데 공연의 결승 지점까지 극을 웃음으로 패스하고 인간의 강렬한 비극성으로 찌릿한 코너킥으로 날려버린다. 마지막의 극적인 골까지, "역시 고선웅이네" 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마지막 4막에서 카르멘은 자신을 사랑했던 남자들의 죽음에도 여전히 남자들을 유혹하고, 이를 견딜 수 없는 돈 호세는 투우사처럼 그녀의 죽음을 향해 칼을 들고 돌진한다. 카르멘을 죽여야 자신의 여인이 될 것 같은 비극적 운명에 돈 호세는 "카르멘...! 내가 카르멘을 가졌다"며 자신도 죽음으로 비극적 남자가 되어 버린다.
공연의 마지막 장면은 야구장에서 홈런의 짜릿한 감각을 느끼는 것 같은 순간을 선사한다. 야구를 보며 9회 말쯤 "이때 홈런 한 방이면 완전한 승리인데..."하는 순간, 홈런을 날려주는 느낌이랄까. 마지막 장면에서 비극성을 우려내는 고선웅의 레시피는 강렬했다. 돈 호세는 사랑에 빠진 카르멘의 변심을 견디지 못해 현대판 교제폭력 살인 사건처럼 카르멘의 숨통을 잔인하게 끊어 놓고 자신도 죽음을 선택한다. 돈 호세와 사랑을 약속했던 미카엘라 역시 깊은 절망감에 죽음을 선택한다. 달덩이 같은 원형 무대 위에 집착으로 떨어질 수 없는 카르멘과 돈 호세는 기댄 채 함께 있다. 미카엘라는 이들을 향해 사바세계의 꽃가루를 날리며 사랑을 축복해 주는 듯한데, 이 장면의 미장센은 서로의 엇갈린 집착이 낳은 비극성을 전달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희비극적인 배우들의 네 박자
이번 공연은 희극적인 연기로 조미료를 뿌리는 병사 대장 즈니가, 극의 분위기 농도를 조절하는 투우사 에스까미오, 허허실실 웃음을 주는 예언자 탕카이케, 강렬한 남성성을 보여주는 집시 대장 가르시아 등, 이번 공연에서 존재감을 드러낸 연기파 배우 강신구, 김병희, 김신기, 장재호와 극단 마방진 배우들이 어울린 무대였다. 특히 카르멘 역의 서지우는 서지혜 연출의 <장녀들> 이후 이번 무대에서는 플라멩코와 연기로 배우의 감각을 보여주었고, 안정된 배우들의 앙상블(최진영, 이정훈, 강득종, 성동한, 조용의, 박혜정, 노유라, 김동지, 오지은)은 고선웅의 신호에 맞춰 움직인다. 공연이 끝난 뒤 고선웅 연출은 왜 다시 고전이냐는 질문에 "현대극과 실험성이 강한 작품도 중요한데, 고전에는 연극적인 모든 요소가 다 들어있다. 대학 때도 고전으로 연극을 배웠다. 서울시극단은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작품으로 예술성 안에 웃음과 감동이 있는 작품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대중적이면서도 예술적인 작품을 발굴하고 무대에서 강렬한 고전 연극 맛을 지켜내는 것이 바로 고선웅의 연출이다. '변강쇠 점 찍고, 조씨고아'를 돌아 다시 온 고선웅의 <카르멘>에는 웃음, 감동, 재미, 비극성의 네 박자가 다 들어있다. 10월 1일까지 세종문화회관M 시어터에서 마지막을 향해 달리고 있다.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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