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공연의 핵심은 밀정 리스트에 대한 인식이다. 정범철의 <밀정 리스트>는 공유소극장 페스티벌 이후 여러 버전의 <밀정의 기록>(2023, 배우진 연출)으로 공연되고 있는데, 이번 공연은 동일 작가 다른 연출의 작품이다. 공연은 두 가지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독립투사 김상옥(金相玉, 1890~1923)이 서른세 살의 나이로 1923년 1월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저격하기 위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하한 실제 의거 사건과 허구적으로 구성한 5일 뒤 경성역에서 사이토를 암살하려 했던 의열단 활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공연은 당시 의열단 동지(同志)를 향해 총구를 겨누던 밀정(密偵)들과 시차가 다른 허구적인 인물들을 설정해 작가와 연출의 총구가 <밀정 리스트>를 향하도록 했다. 시간 배경은 실제 의거 사건 뒤 6년이 흐른 1929년, 주 무대는 의열단이 활동하던 경성의 어느 허름한 도피처이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의열단 최태규(오문강 분), 신화진(김남호 분), 김명순(이나경 분)이 상해에서 사이토 암살을 위해 권총 4구와 탄환 800발을 가지고 오는 김충옥(임일규 분)과 울산에서 활동하는 정설진(임기현 분)을 만나면서 공연은 시작된다.
◆친일로 분열된 역사의 인식 정범철 작, 김성진 연출 <밀정 리스트>
송강호 주연의 영화 <밀정>에서 각인된 대사가 있다. 독립을 위해 싸우던 동지를 향해 "적인가, 동지인가? 어느 쪽에 이름을 올리겠습니까?" 나라를 잃은 절망의 시대, 조력자와 부역자를 분별할 수 없는 분열의 세태를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말이다. 나라를 되찾겠다고 의열단을 조직해 독립 활동을 해도 그 내부에 밀정과 친일부역자들이 많았다는 것은 알려진 얘기다. <밀정 리스트>(정범철 작, 김성진 연출, 극발전소301) 공연에서 단연 흥미로웠던 것은 2019년 'KBS 탐사보도'로 밝혀진 895명에 달하는 역사의 밀정 리스트들의 명단을 마지막 장면 끝에 무대 스크린으로 투사하는 2분 정도의 시간이었다. 보도로 알려진 이름들이 무대에 각인되며 연극의 핵심적인 서사로 완성된다. 이번 공연이 마지막 자막으로 밀정들을 적시하기 위해 달리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장면이 전달되지 않았다면, 공연 <밀정 리스트>는 싱거웠을지도 모른다. 희곡에서도 마지막에 명단을 공개하고 연극적인 장면으로 연결되는데 작가의 의지와 기록이 없었다면 <밀정 리스트>는 임정 시대 의결단의 독립운동을 재소환하는 정도로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2분의 순간은 국뽕에 취한 듯한 뜨거움으로 전류를 흐르게 하는데 관객들은 최근 육군사관학교 내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 동상(흉상) 철거 논란을 떠올리며, 연극에 더욱 몰입하는 듯 보였다. 독립운동 수훈 뒤에도 친일 논란 사례가 보도로 넘치고 있다. <밀정 리스트>의 작가는 극 중 인물의 대사를 통해 그러한 상황을 드러낸다. 경성을 기점으로 하는 의열단의 중심인물인 김충옥을 따라 활동한 여동생 김명순(이나경 분)이 마지막에 밀정 내부자로 밝혀지는데, 죽음의 순간 그녀가 총구를 바라보며 하는 말이다. "지금도 우리나라 여기저기에 밀정이 많다. 누가 동지이고, 누가 적인지 헷갈린다. 현실은 참으로 혼란스럽다." 여전히 분열되어 있는 현실의 세상을 향한 대사가 아닌가. 장면은 한 발짝 더 들어간다. 상해임시정부 시절로 시간을 되돌리며 의열단의 독립운동사(史)에 존재하는 내부자 '밀정 리스트'을 저격한다. 밀정을 저격하는 한 발의 총성과 탄환은 임정 시대를 돌아 요즘 대한민국 현실에 박힌다. 충옥은 누가 적인지, 동지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설진을 향해 "끝까지 싸워야 해. 우리의 주권을 되찾는 그 날까지. 역사가 우릴 기억해." 지금의 현실을 저격하는 대사들이 뜨겁다.
◆100년의 세월을 돌아와도 지워지지 않는 밀정들….
극의 플롯은 간결하다. 작품의 묘미는 적과 동지의 경계에서 '밀정 리스트'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명순의 반전에 있고, 밀정을 색출하는 김충옥이 하이라이트 장면을 구성한다. 영화, TV드라마, 시사 보도로 익히 알려진 이야기면서도 시공간, 임정과 역사적 배경, 의열단과 밀정 리스트를 연극적 공간으로 압축해 의열단들의 활동에 초점을 맞춘다. 역사를 환기하며 역사 속 내부자들을 통해 동지에서 서로 총을 겨누는 분열의 역사를 인식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1929년과 2023년은 100년의 시간 차가 있지만, 여전히 내부 총질의 분열은 계속되는 시대가 아닌가. 누가 밀정인지는 추후 역사가 판단하겠지만 말이다. 이번 공연은 영화처럼 일루전을 구조화하기 힘들기 때문에 배우들의 연기가 중요했다.
극 초반은 사이토의 암살 계획에 초점이 맞춰진다. 김충옥은 종로경찰서 형사 박경식(다무라 경부 보, 윤관우 분)을 통해 사이토 총독의 동선과 종로경찰서 내부 정보를 비밀리에 전달받고 의열단들은 총독 1차 암살계획을 세운다. 거사 당일 폭탄 투하 계획이 노출되고, 아수라장이 된 종로경찰서의 폭탄 투하 오류로 죽은 줄만 알았던 정설진이 살아 돌아오면서 밀정들의 친일 행위는 의열단의 분열로 이어진다. 김충옥은 암살 계획 당일의 시간으로 무대를 되돌린다. 무대로 소환된 사건 현장에서도 밀정을 밝힐 수 없게 되자, 의열단 내부는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며 일본 경찰 박경식부터 김충옥, 신화진, 최태규, 김명순 등 모두가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된다. 모두가 밀정으로 의심받을 때쯤 김충옥은 의열단 동지들에게 경성역 폭파 계획을 각각 다르게 노출하고 밀정 색출에 전력을 다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최태규가 개인의 이익을 위해 내부 정보를 넘긴 밀정으로 드러나고 김충옥의 총이 그의 가슴을 향할 때, 밀정만이 알 수 있는 내부 정보를 폭로하는 순간, 명순은 최태규의 입을 막기 위해 그를 향해 총을 쏘고, 은신처는 밀정들의 핏물로 얼룩진다. 은신처로 들어선 다무라 경부가 명순을 저격하면서 사이토 암살 계획을 흘린 내부 밀정은 최태규와 김명순으로 밝혀진다. 적과의 동침을 한 의열단의 밀정 리스트는 비로소 완성된다.
영화, TV드라마, 시사 보도로 알려진 역사적 서사일수록 작가의 허구적 드라마와 역사적 서사간 차이에서 오는 긴장감이 중요하다. 극적 행동과 대사의 몰입감보다 플롯의 짜임을 극대화할 수 있는 연기의 패턴도 요구된다. 이번 공연의 주제의식은 애국의 전류가 흐르는 '국뽕'에 취하자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현충원에 있는 지워지지 않는 밀정 리스트에 닿아있으면서도,여전히 분열된 서로를 '밀정'으로 의심하는 현실을 타격하는 데 있다. 역사적 서사는 재현적이면 무거워진다. 극의 함정을 숨긴 채 반전과 결말까지 달려가며 극적인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이 관건인데, 이 열쇠를 조이고 푸는 것은 작가가 극 안에 만든 함정과 장치를 숨길 수 있는 배우들의 연기이다. 이런 점에서 최태규 역의 오문강, 다무라의 박경식, 김충옥의 임일규 등의 연기가 극을 주도했다. 연출의 측면에서는 종로경찰서 폭파 장면에서 관객들의 상상이 극대화될 수 있도록 암전 전환 때 영화관에 온 것처럼 음향을 감각적으로 설정한 점, 김충옥과 다무라의 국수집에서의 은밀한 거래 장면의 무대배경을 영화적인 색감으로 사실적으로 재현한 점 등이 좋았다. 아쉬운 점은 배우들의 연기의 속도가 벌어지면서 밀도 있는 속도감을 내지 못해 정체된 몇 군데가 보인다는 것이다. 연기로 극텍스트의 의미를 전달하려는 순간 극은 깨지고 벌어진다. 연출은 이 경계를 세밀하게 조율해야 한다.
누군가와 긴밀한 대화를 2시간 동안 한다고 가정했을 때 대화 사이에서 일어나는 움직임, 제스처, 사이, 대화의 시간에는 무수한 변화들이 있다. 그러나 제3의 인물이 그 장면을 보고 뇌와 가슴으로 기록했을 때 기억에 남는 것은 몇 가지다. 모든 대화와 장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만큼 설득의 불필요한 소비다. 이번 공연의 경우 극적인 집중과 몰입을 드러낼 때 앞서 얘기한 무거운 역사의 소환이 될 수 있다. TV드라마처럼 다루고 연극적 장치를 극대화하는 것이 유리하다. 마지막 2분, 밀정 리스트 명단의 공개는 그 자체로 '사실적' 연극이 되었고, 명단의 투사로 연극 <밀정 리스트>가 완성되었다 할 수 있다. 이번 공연은 A와 B팀 출연자가 전혀 다른 동선으로 <밀정 리스트>를 만들고 있다. B팀 주인공 김충옥(김동현 분), 박경식(류지훈 분), 김명순(장희재 분), 최태규(허동수 분), 신화진(박수연 분), 정설진(조승민 분)이 안정감 있는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 극단 '몽중자각'을 이끄는 김성진은 요즘 <물고기 남자>, <태극기가 바람에>, <대화의 습도> 등 다양한 희곡을 쓰고 연출하고 있다. 김성진 연출은 이 작품을 통해 "일제강점기 시대 역사적 사실과 밀정으로 활동해 온 분들이 여전히 현충원에 안치되어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도 중요했다. 밀정들 또한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 살아간 사람들이었다는 것과 민족이 분열되어야만 했던 그 역사적 시대와 오늘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라고 했다. 공연 후에는 배우들과 연출, 작가와 작품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졌는데 'A와 B팀 중 어느 팀의 공연을 선택하는가'는 관객 판단이지만, 작가와 연출은 "전혀 다른 분위기"라고 얘기한다. 10월 1일까지 대학로 민송아트홀 1관에서 공연되고 있다.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댓글 많은 뉴스
한동훈 이틀 연속 '소신 정치' 선언에…여당 중진들 '무모한 관종정치'
비수도권 강타한 대출 규제…서울·수도권 집값 오를 동안 비수도권은 하락
[매일칼럼] 한동훈 방식은 필패한다
[조두진의 인사이드 정치] 열 일 하는 한동훈 대표에게 큰 상(賞)을 주자
안보마저 정쟁 소재?…북한 러 파병에 민주당 도 넘은 정부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