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차로 한시간 거리의 영천 시안미술관(화산면 가래실로 364)은 완연한 가을의 정취를 느끼기에 더할나위 없는 곳이다. 드라이브 삼아 미술관까지 이어지는 한적한 농촌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푸르고 높은 하늘과 나뭇잎 색의 미세한 변화, 수확을 기다리는 열매들의 모습이 눈을 즐겁게 한다.
그래서인지 이곳은 도심과 다소 떨어진 곳임에도, 주말이면 미술관 앞 잔디에 돗자리를 펴고 여유를 즐기는 가족과 연인들로 가득하다. 이들의 모습은 다양한 조각들과 어우러져 마치 외국의 어느 조각공원에 있는 듯한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이렇듯 매년 4만여 명이 찾는 시안미술관이 올해 개관 20주년을 맞았다. 웬만한 다짐으로 시작한 일이라도, 개인이 20년간 사립미술관 운영을 이어온 건 쉽지 않았을 터. 변숙희 시안미술관 관장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 같다고 느껴지는 순간들도 있었지만 사회적 역할을 다하겠다는 마음 하나로 지금까지 달려온 것 같다"며 "상업적인 전시가 아닌, 전문적이고 깊이 있는 전시를 고집해왔기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오로지 그의 노력 하나로, 시안미술관은 오지(?)에 위치한 미술관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빛나는 성과들을 이뤄내왔다. 연 5~6회의 전시를 열어오면서 지역 주민과 문화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교육 기부,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운영 등 지역과 함께 하는 문화예술 활동을 진행했고 아트레지던시를 운영해 우수 작가 발굴과 지원에도 앞장서왔다.
국내외 전문가들을 초빙한 국제미술컨퍼런스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데 이어, 문화 소외계층에 예술 향수권을 제공하고 지역 미술의 부흥을 이끈 공로로 변 관장이 문화체육장관상을 받기도 했다.
시안미술관 바로 뒤 '가래실 문화마을' 조성사업도 빼놓을 수 없다.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의 '마을미술프로젝트' 공모에 선정돼 9억원 가량의 예산을 지원 받아, 평범했던 농촌 마을을 문화마을로 탈바꿈시킨 것. 이곳은 조각과 벽화 등 60여 점의 공공미술 작품이 설치된 '지붕 없는 미술관'으로, 마을의 목가적인 풍경과 아름다운 그림들이 어우러져 많은 지역민들이 찾고 있다.
변 관장은 "마을을, 지역을 문화로 물들이기 위한 노력을 이어왔다. 문화를 접해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크다. 그 힘을 알기에 지역민들이 양질의 문화예술을 접할 수 있게 쉼없이 달렸다"고 말했다.
지난 9일부터 진행 중인 개관 20주년 특별전 '타불라 라사: 하얀 방'은 시안미술관의 지난 20년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성을 엿볼 수 있는 전시다. 한국 현대미술의 진정한 가치와 정체성에 대한 고민, 질문을 관람객과 공유하고자 기획된 이번 전시에는 국내외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권오봉, 김호득, 민재영, 박세호, 박창서, 박철호, 신경철, 심윤, 유주희, 이배, 좌혜선, 홍성덕 등 다양한 연령대의 작가 12명이 참여했다.
벽과 바닥, 천장까지 온통 하얗게 칠해진 전시장에는 회화와 사진, 서예, 조각 등 여러 장르의 무채색의 작품들이 채워져있다. 미술관은 여기에 관람객들에게도 검은색 상의를 입고 오길 제안한다.(검은색 상의를 입으면 입장료 1천원을 할인해주는 이벤트를 진행 중이다.) 관람객의 검은색 동선도 하나의 예술이 되는 셈이다.
박천 큐레이터는 "다양한 서사를 담은 작품과, 각각의 삶을 품은 관람객들이 만들어내는 동선이 모두 하나의 예술로 연출된다"며 "깨끗하게 비어있는, 물리적·사유적 여백이 가득한 하얀 방에서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보는 전시"라고 말했다.
시안미술관은 앞으로 전시 연계 프로그램 등 대중화를 위한 발걸음을 이어갈 계획이다. 변 관장은 "그간 미술관이 자리를 잡고 정체성을 잡아가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미술계에서의 입지를 다졌으니,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SNS 홍보와 이벤트를 통해 대중 인지도를 높여가는 데도 신경 쓰려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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