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풍금은 아리아오르간에서 제작한 4옥타브로 구성된 작은 풍금이다. 이 풍금은 유년 시절 예배당에 있던 유일한 악기였다. 이후에 나온 풍금은 초기 제품보다 건반 수가 늘어나고 모양도 번듯했지만 음색이 인공적으로 바뀌어 이전처럼 부드럽거나 자연스럽지 못했다.
2004년 무렵 시외의 허름한 골동품상에서 풍금을 발견했다. 보는 순간 30여 년 전의 그 풍금과 똑같았다. 환풍구의 금빛 줄무늬 천과 바람 세기를 조절하는 장치도 같았다. 칼로 계이름을 새겨 놓아 건반이 지저분해져 있었지만 한 발로 페달을 밟고 떠오르는 대로 '메기의 추억'을 천천히 쳐보았다. 풍금은 금잔디 동산의 풍경과 거기 스며들어 있는 오래된 냄새를 고스란히 들려주었다.
풍금은 리드 오르간(Reed Organ)을 우리말로 번역한 이름이다. 풍금은 페달을 밟아 금속 리드에 바람을 불어넣어 소리를 낸다. 바람으로 동력을 얻는다는 점에서 풍금은 다양한 크기의 피리를 합주하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음악을 만들어내는 이 바람 속에는 누군가 있다. 그는 날개를 달고 천천히 공중을 휘저으며 떠다니는 영혼이다.
풍금은 근대를 가장 먼저 맞이한 곳에 있었다. 19세기 말 선교사가 들여온 풍금은 학교와 교회 같은 공적인 장소에서 서구식 음악의 반주를 맡았고 근대교육과 종교적 회합을 안정적으로 정착화하는 데 기여했다. 결핍의 시대에 풍금은 서구 문화의 첨병으로 꽃이 만발한 듯한 음색으로 사람들의 호기심과 의욕을 자극하고 이들을 새로운 교육 제도와 종교 안으로 편입시켰다.
풍금은 오래된 미래, 잃어버린 유년의 역사를 들려준다. 유년은 확정되어 있던 행복, 약속의 땅 같은 것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행복과 약속의 땅은 원하는 대로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 시절 풍금이 일으키는 바람 속에는 꽃과 나무가 가득한 교회 마당과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 예배당을 둘러싼 측백나무 울타리와 그 너머 가능성의 넓고 깊은 바다가 출렁거리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음악 시간이 끝나면 아이들이 풍금을 서로 쳐보려고 했다. <비행기>, <고향의 봄> 같은 동요를 무난하게 치는 아이들도 있었다. <파란 마음 하얀 마음>, <누가 누가 잠자나>, <어린 음악대> 같은 옛 동요는 풍금이 아니면 그 느낌을 그대로 전달하기가 어렵다.
어느 날 풍금이 있던 자리에 피아노가 들어섰다. 풍금이 있던 자리가 얼룩이나 그림자가 드리운 자리라면 피아노가 들어선 자리는 빛이 환하게 비치는 명랑하고 충만한 공간이었다. 풍금 소리가 구름처럼 불분명하고 덩어리져 있다면 피아노 소리는 선명하고 맑았다. 풍금 소리가 무던한 소리라면, 피아노 소리는 예리하고 개별화된 소리였다. 풍금에서 피아노로의 변화는 근대에서 현대로, 전체에서 개인으로, 낡은 시대에서 새로운 시대로의 진보였다.
어쩌면 풍금이 있던 자리는 갈라파고스 군도처럼 크고 작은 사건과 기억들이 모여 여전히 격리된 하나의 왕국을 보존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 왕국의 결핍은 점차 그것을 보완하고 충족할만한 동력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다윈의 진화론과 유사하다.
풍금은 시간을 들려준다. 물리적이고 객관적인 시간이 아닌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시간. 이것은 특정한 방향 충동을 일으키고, 내가 경험한 구체적인 시간의 내용을 불러온다. 과거의 기억은 현재와 함께 경험된다. 옛날이, 엄마를 부르는 송아지 울음소리 같은 풍금 소리에 실려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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