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국보 제1호 고구려 평양성
북한에서는 200개가 넘는 역사유적을 국보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는데 국보 제1호가 고구려 평양성이다.
만일 북한의 평양에 검증된 고조선 유적이 있었다면 그것이 국보 1호가 되었을 것이다. 북한에서 고구려 평양성을 국보 1호로 지정한 것은 북한의 평양이 고조선의 평양이 아님을 반증하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
중국 하북성 탁록에는 4천800년 전 치우와 황제의 전쟁터가 남아 있고 한족들은 여기에 치우, 황제, 염제를 모신 삼조당三祖堂을 세웠다.
내몽골 적봉시에는 5천500년 전의 홍산문화 유적이 있고 산서성 양분현襄汾縣에는 단군과 동시대에 건국했던 제요帝堯의 도사陶寺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북한의 평양이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하고 도읍을 정한 지역이라면 이를 문헌적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누가 북한의 평양을 최초로 고조선의 평양이라고 말했는가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고구려본기 제5 동천왕 21년(247) 조항에서 고구려가 전란으로 말미암아 환도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이 거주하던 곳이다(平壤者 本仙人王儉之宅也)"라고 했다.
아마도 이것이 한국문헌 상 평양이 단군왕검의 도읍지임을 천명한 최초의 자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김부식은 평양이 단군왕검이 거주했던 곳이라는 사실만을 언급하고 그 구체적인 위치는 밝히지 않았다. 즉 단군왕검의 평양이 대륙에 있었는지 한반도에 있었는지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런데 일연의 '삼국유사' 고조선조에서는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환웅의 아들 단군왕검이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칭했다(都平壤城 始稱朝鮮)"라고 말한 다음 평양성 밑에 "지금의 서경이다(今西京)"라는 본래 '고기'에 없는 말을 주석으로 첨가하였다.
단군조선의 평양이 일연이 살았던 고려 때는 지명이 서경으로 변경되었다고 보아 "지금은 서경이다"라고 친절하게 주석을 덧붙인 것이다. 모르긴 하지만 이것이 고조선의 평양을 북한의 평양으로 간주한 최초의 기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나오는 '고기'에 대한 주석들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환인을 불교의 제석천으로 해석하고 환웅이 내려왔다는 태백산을 북한의 묘향산으로 간주하고 하북성 발해만에 있던 백이 숙제의 나라 고죽국을 북한의 해주로 표기 한데서 보듯이 역사 사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그래서 '삼국유사'의 주석은 일연의 직접 저술이 아니라 그 제자들에 의해 추가된 것으로 보거나 심지어는 명나라의 속국이나 다름없던 한양조선에서 삼국유사를 간행할 때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고 대륙 관련 내용을 스스로 위조했을 가능성까지도 제기된다.
따라서 고조선의 평양을 고려시대의 서경이라고 최초로 언급한 '삼국유사'의 주석 또한 그것이 과연 어떤 근거를 가지고 말한 것인지 의문이다.
현재 한국학계에서는 동천왕 시대의 평양성 위치에 대해 현 북한 평양설, 북한 자강도 강계설, 현 중국 길림성의 집안시 동대자東臺子 유적설, 환인지역설, 국내성설 등 다양한 견해가 제출되어 있으며 통일된 견해가 없다. 여러 견해 중에 다수의 지지를 받는 설은 북한 평양설이 아니라 집안시 국내성설이다.
◆'조선왕조실록'으로 본 북한의 단군릉
북한의 평양을 단군조선의 평양이 아니라 고구려의 평양이라 할 경우 제기되는 의문은, 평양에 있는 단군릉을 과연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해서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단군의 무덤에 관한 기록은 '숙종대왕실록' 권31, 23년 7월 조항에 "이인엽이 강동의 단군 묘소와 평양의 동명왕 묘소를 매년 손보고 관리할 것을 요청하였다"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것이 단군 묘소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숙종시대 이전의 기록에는 단군의 사당을 세워 제사지냈다는 말은 보이지만 단군의 무덤이 있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숙종대왕 이전까지는 평양에 단군 사당이 있었으며 단군의 묘소는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고려 때는 구월산에 삼성사三聖祠를 세워 환인, 환웅, 단군을 제사 지냈고 한양조선에서는 세종 11년 평양에 최초로 단군 사당을 건립하였다.
북한의 평양에는 본래 단군의 묘소가 아니라 사당이 있었는데 숙종시대에 이르러 어떻게 갑자기 단군 묘소가 등장하게 되었는가.
평양의 강동군에 있는 단군 묘소가 등장하게 된 배경을 다음의 '정조대왕실록' 권22, 10년 8월 9일 조항을 살펴보면 그 대략을 짐작할 수 있다.
"승지 서형수가 아뢰기를, 신이 강동에서 벼슬할 때 보았는데 고을 서쪽에 큰 무덤이 있었습니다. '옛 노인들이 서로 전하여 단군의 묘소라 말하였으며 유형원의 '여지지輿地志'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의 허실과 진위는 물론하고 어떻게 그대로 황폐화되도록 맡겨두어 사람들이 가서 땔나무를 하고 소와 양을 방목하도록 할 수가 있겠습니까(故老相傳 指爲檀君墓 登於柳馨遠輿地志 則毋論其虛實眞僞 豈容任其荒蕪 令人樵牧乎)"
여기서 제시된 단군 묘소의 근거는 두 가지다. 하나는 옛 노인들의 말에 전설로 내려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형원의 '여지지'에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가 다 결정적인 근거는 되지 못한다. 전설은 전설일 뿐 그것이 역사 사실은 될 수 없다. 유형원은 조선 후기의 인물로서 그의 저서가 단군 묘소를 실증하는 결정적인 자료로 인정되기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단군 묘소의 보존을 조정에 건의한 서형수 또한 그것이 단군 묘소라는 역사적 확증을 가지고 한 말이 아니라 허실과 진위를 떠나서 그 묘소가 단군의 무덤이라고 민간에서 전해오는 만큼 황폐화되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는 후손으로서의 도덕적 도리를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고종실록' 권40, 광무 4년 1월 조에는 의관議官 백호섭白虎燮의 상소문 가운데, 강동에 있는 단군묘를 단군릉으로 격상시켜 모셔야 한다고 건의하며 말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지금 그 옷과 신발을 모신 무덤이 강동읍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5리 밖의 태백산 아래에 있습니다. 이는 이미 고을의 '읍지'와 '관서문헌록'에 명백히 실려 있습니다.(今其衣履之藏 在江東邑治西五里 太白山下 此旣昭載於該邑志與關西文獻錄)"
◆우리 민족을 하나로 묶어줄 단군
백호섭은 강동에 있는 단군 무덤이 단군의 시신을 모신 무덤이 아니라 옷과 신발을 모신 무덤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도 전쟁터에 나가서 전사하여 시신을 찾을 수 없을 때 사자의 옷이나 유물을 대신 묻기도 하는데 이를 의리지장衣履之藏이라 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통해서 검토해본다면 북한 평양의 강동읍에 있던 단군 무덤은 실제 고조선을 건국한 제1대 단군의 유해를 모신 무덤이 아니라 후기에 단군을 추모하던 단군의 자손들이 단군을 추모하여 조성한 무덤임을 알 수 있다.
자손이 조상의 사당을 세워 추모하는 일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서 가능하다. 고려조와 한양조선에서 단군 사당을 세워 제사를 받들었던 것은 기록으로 증명된다.
그러다가 한양조선 후기 숙종 때에 이르러 단군의 묘소가 등장하게 된 것은 평양의 강동에서 거대한 무덤을 발견하자 사람들은 이를 단군의 무덤이라 인식하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단군의 시신을 모신 무덤이 아닌 옷과 신발을 모신 무덤으로 민간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이 단군 무덤이 구한말 고종 때 단군릉으로 격상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으로 본 평양의 단군릉은 고조선을 건국한 국조의 능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상징은 단군이다. 단군의 자손이 고구려, 백제, 신라로 갈라져 삼국시대가 열렸다. 지금도 우리는 나라가 통일되지 못한 채 휴전선이 가로막혀 있다.
우리 민족의 시대적 과제는 통일인데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 민족을 하나로 묶어줄 상징적 인물은 단군이고 단군의 깃발 아래 민족이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역사성을 떠나 단군릉을 대대적으로 건축하여 민족의 구심점으로 삼고자 하는 북한의 정신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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