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항저우에서 개최되고 있는 아시아게임에서 대한민국은 금32, 은42, 동 65개로 메달 수 합계 139개로 종합 3위를 달리고 있다. 여자양궁 임시현과 올림픽 3관왕 안산 선수의 개인전 금메달 격돌이 뉴스로 흘러나오면서 2위 일본을 바짝 추격하고 있다. 리우올림픽(2016) 때이다. 세계반도핑기구(WADA) 산하 러시아 반도핑기구(RUSADA) 검사관 비탈리 스테파노프와 그의 아내이자 러시아 육상 국가대표 선수인 율리아 스테파노바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두 사람이 긴장한 표정으로 전 세계 카메라 앞에 섰다. 잠시 뒤 그들은 러시아 정부가 출전 선수의 도핑(doping) 의혹에 개입하고 사실을 은폐했다고 폭로한다. 어떤 선수는 10대 부터 코치들에게 약물 사용을 권유받아 기록 경신을 위해 몸에 직접 약물을 주입했다는 폭로내용으로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이 실화를 바탕으로 작가이자 감독인 브라이언 포겔은 특정 국가의 올림픽 출전 선수들의 도핑 의혹을 파헤친 다큐멘타리 영화 <이카로스>를 넷플릭스에 개봉해 제90회 아카데미 장편 부문 다큐멘타리 상을 받게 된다. <이카로스>는 도핑 테스트 시스템과 국가의 반윤리적 개입을 폭로하는 영화이다. 한 선수를 줄에 매달린 인형처럼 조작하는 이미지로 채워진 이 영화의 포스터는 강렬하다. 도핑 의혹을 조작, 은폐, 지휘하는 거대한 손으로부터 관계자와 국가가 개입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브라이언 포겔 감독은 도핑 의혹으로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사이클 영웅 '랜스 암스트롱'을 떠올리며 이 작품을 제작했다고 한다. 올림픽 금메달을 향한 선수의 욕망은 스포츠 국가가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전이된 채 특정 선수들의 도핑을 국가가 심지어 지원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스포츠계에 끊이지 않은 도핑과 위계 폭력의 의혹들, 그리고 특정 다큐멘터리 영화를 들먹이는 것은 극단 신작로의 <새빨간 스피도(Red Speedo)>(이영석 연출,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가 올림픽 출전 준비를 하고 있는 수영선수 레이(경지은 분)를 통해 조직적으로 은폐되고 침묵을 강요하는 도핑 시스템의 민낯을 들춰내고 있기 때문이다.
◆ 스포츠의 공정과 도핑이라는 비윤리
스포츠의 공정과 도핑의 반윤리적인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는 88 서울올림픽의 한 장면이 있다. 미국의 육상선수 칼 루이스가 20대 청년으로 84 LA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면서 세계대회와 올림픽의 메달을 싹쓸이해 살아있는 전설로 불려질 때였다. 88 서울올림픽 100m 결승에서도 칼 루이스가 우승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캐나다의 벤 존슨이 9초 79의 세계기록을 세우며 칼 루이스를 제치는 역전으로 세기의 명장면이 만들어졌다. 벤 존슨이 스테로이드의 일종인 스태노조를 복용한 것이 밝혀지면서 금메달 박탈과 출전 정지가 내려졌다. 재기할 수 있었던 경기에서도 테스토스테론 양성 반응으로 그는 은퇴하게 된다. 스포츠는 각본 없는 공정한 드라마이며 인간의 몸, 기술과 기량, 정신으로 금메달을 향한 치열한 승부를 거는 감동의 경기여야 한다는 사실이 벤 존슨을 비롯한 현재에도 끊이지 않는 도핑 의혹 사례로 무너지고 있다. 금메달의 욕망으로 특정 선수는 약물의 유혹을 느끼고, 감독을 비롯한 일부 스포츠 관계자들도 도핑을 침묵으로 부채질하고 있는 현실이다. <새빨간 스피도>는 하계 올림픽 출전 준비를 하고 있는 한 수영선수를 통해 스포츠의 공정성과 윤리 문제를 타격한다. 사회적 성공의 욕망을 개인화해 성취하는 스포츠계의 고질적 문제들을 들춰낸다. 작가인 루카스 네이스(Lucas Hnath)는 <새빨간 스피도>를 통해 아메리칸 드림을 향해 새빨간 스피도 수영복을 착용하고 수영장 물 속으로 뛰어드는 수영선수의 약물에 의한 심리적인 몰락을 그려내면서도 감독과 매니저가 반칙과 특권으로 선수로부터 성공의 욕망을 착취하는 과정을 치밀하게 그려냈다.
입센의 <인형의 집> 15년 뒤를 다룬 <인형의 집, Part2>로 국내 연극 무대에도 친숙한 작가 루카스 네이스는 <새빨간 스피도>의 뉴욕 초연 공연(2016)을 통해 미국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며 오비상(Obie Awards)을 수상했다. 이 작품에는 4세부터 수영을 시작해 천재적인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레이(경지은 분)가 등장한다. 레이는 수영선수로 미국의 기대를 받고 있는 인물로 설정되었다. 레이는 10세 때부터 전국 대회 입상을 시작으로 올림픽 금메달의 꿈을 키워왔다. 자동차 사고로 갈비뼈가 부러져도 붕대를 감싸고 물속으로 뛰어들었고 미국에서 금메달을 딴 마이클 펠프스를 두 번이나 이겼으며 라이언 록티도 제칠 정도의 천재적인 수영 감각을 보여왔다. 레이의 법률 대리인으로 매니지먼트를 맡고 있는 그의 형 피터(박종현 분), 레이를 세계적인 수영선수로 키워내려는 감독(김혜리 분), 운동치료사이자 레이의 전 여자친구인 리디아(신유안 분)가 등장한다. 리디아는 레이가 HCG를 몸에 주입해온 사실을 알고 있는 인물이다. 레이는 호르몬제를 투입해서라도 올림픽의 금메달을 목에 걸고 세계적 수영복 회사인 스피도(Speedo)의 광고 모델이 되어 부와 명예를 쟁취하고자 하는 인물이다. 이번 공연은 이영석 연출의 전작 <비평가>에서처럼 '젠더 프리'로 공연되어 남성 인물인 레이와 감독을 여배우가 맡았다.
◆ 빨간 스피도를 향한 욕망과 공정하다는 착각
루카스 네이스의 <새빨간 스피도> 희곡은 촘촘하면서도 강렬하다. 다큐멘타리 <이카로스>를 보는 것처럼 극과 사회적인 메시지는 선명하고 연극적 구성과 반전, 인물의 캐릭터와 역할도 구체적이다. 여기에 수영선수들의 꿈의 광고인 수용복 브랜드 스피도를 엮고 빨간색 수영복으로 상징되는 레이와 주변 인물의 금메달과 부의 욕망을 강렬하게 투사하면서도 도핑 의혹과 약물중독에 시달리는 선수의 심리를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우선 희곡에 내재된 사회적 함의(含意)의 거대함이 공연 방식으로 농축되고 있는지 공연의 표현방식을 살펴본다. 무대는 레이가 하계 올림픽 1개월을 앞둔 시점에서 시작된다. 레이의 수영클럽(수영장)이 배경이 되는데, 무대는 일루전(Illusion)의 효과를 일으키며 올림픽 수영경기장에 온 것처럼 전달된다. 무대 뒤편으로 조명을 처리하여 물결이 출렁거리는 분위기를 내고 1~2개의 수영장 레인을 설치했다. 레이는 새빨간 스피도 수용복을 입고 바다뱀 문신을 한 채로 훈련에 집중하고 있다. 뱀은 등 전체를 덮고 있고 꼬리는 둔부를 지나 왼쪽 다리를 길게 감싸고 있다. 레이의 몸과 한 몸같은 바다뱀 문신은 우승 후 바다뱀 꼬리 부분 문신이 그려진 한정판 스피도 수용복을 만들고자 하는 레이의 강렬한 욕망을 상징한다. 신화적 구원처럼 레이의 문신은 주술의 믿음으로 올림픽 우승을 지켜내려는 의지를 표상하기도 한다. "우리 수영할 때 카메라가 위에서 우릴 보고 있잖아. 그때 내가 어딨는지 정말 쉽게 알 수 있어, 그래서 다들 ‛우와 저 바다뱀은 누구지, 정말 끝내준다.' 라고 할 수 있게 한정판 스피도를 만들려고 (중략) 꼬리 부분을 수영복에 그리는 거야" 레이와 리디아의 대화에서도 그러한 욕망은 드러난다. 무대로 돌아가 보자. 남자수영선수 레이로 분한 배우 경지은의 몸은 수영선수로 착각할 만큼 다져진 근육과 탄력으로 수영선수의 신체로 감각된다. 극이 진행될 때마다 트럼펫(에어혼)을 무대에서 연주하며 극의 분위기를 환기하는데, 때로는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이 임박한 분위기를 내기도 하고 레이와 피터, 감독, 리디아의 심리적인 내면을 전달하기도 한다.
1장의 등장부터 레이는 체중 조절과 근력 강화를 위해 당근을 물고 훈련에 집중한다. 그의 형 피터가 등장해 해설자처럼 레이의 과거 정보를 대화를 통해 제공한다. 개인 훈련은 이어지고, 수영클럽 내부 아이스박스에서 금지 약물인 HCG이 발견된다. 레이의 출전이 불투명해지는 가운데, <새빨간 스피도>는 레이의 국가대표 출전 자격 결정을 하루 앞둔 시간에 집중한다. 약물을 복용하고 있는 선수는 누구인가. 레이와 함께 훈련을 받고 있는 한 선수가 거론된다. 피터는 감독을 향해 레이를 변호하고, 감독과 피터는 레이의 금지 약물 복용을 알면서도 심리적인 거래 관계를 침묵으로 형성하게 된다. 2장에서 레이는 피터를 향해 약물 중독 사실을 고백하고 아이스박스에서 발견된 약물도 자신의 것이라고 털어놓는다. 약물의 힘으로 미국의 수영스타 마이클 펠프스와 라이언 록티를 누르고 1등을 한 레이를 미국 사회가 주목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도핑 테스트에서도 드러나지 않는 약물에 의존하게 되었다는 레이의 고백에도 형 피터는 레이의 올림픽 우승이 자신에게 가져다 줄 부에 대한 욕망으로, 레이의 약물 중독을 은폐하기 위해 모종의 거래를 감독에게 제안한다. 레이가 올림픽 국가대표 출전 자격 경기를 하루 남겨 두고, 그동안 약물을 조달해주었던 전 여자친구 리디아를 찾아가 HCG 1회분을 구해달라고 애원하며 <새빨간 스피도>는 레이의 몰락을 예비하는 반전(反轉)의 스파크를 일으킨다.
이어지는 장면이다. 리디아에게 약물을 구걸한 사실을 털어놓는 레이와 피터 간 격렬한 대화가 오가고 올림픽 우승 후보가 분명해진 레이의 기자회견을 준비하는 상황들이 지나간다. 감독은 이미 레이의 약물 복용을 눈치채고 있었으면서도 묵인하려는 그때, 메트로니다졸이라는 고양이 약을 HCG로 오인 투여한 레이는 경기에서 훌륭한 성적을 거둔 직후 공황발작을 일으키게 된다. 이 장면에서 레이 역할을 맡은 경지은 배우의 연기가 상당히 감각적으로 표현되고, 레이의 발작을 마치 상품의 도구처럼 바라보는 감독과 피터 두 사람의 심리적 묘사가 강렬했다. 죽음의 순간이 다가온 것처럼 레이의 발작이 이어지는데도 감독과 피터는 금지 약물 복용을 은폐하는 거래가 이어지며 도핑 문제를 대하는 스포츠계의 새빨간 민낯이 드러난다. 감독은 극 중 이런 말을 한다. "넌 유혹에 넘어간 거였어. 나도 이해한다. 너는 오늘 단 하루만, 네가 쓰면 안 되는 약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너는 네가 썼다고 생각한 그걸(HCG) 안 썼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아무 것도 안 쓴거야." 레이는 우승을 위해 스포츠의 공정한 규칙을 어기고 도핑한 사실을 고백함으로써 약물 중독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지만, 피터와 감독의 거래로 레이는 두 사람의 부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레이의 약물 중독은 은폐된다. 극의 마지막 메트로니다졸을 리디아 집에서 훔쳤다고 고백하는 레이의 간절한 절규가 이어지고 레이의 도핑 고백을 막기 위해 리디아가 위험해질 수 있음을 인지시키는 피터의 폭력적인 대응으로 레이와 피터의 격투가 벌어진다. '새빨간 스피도'를 향한 욕망과 선수의 삶으로 돌아가려는 양심이 부딪치는 치열한 격투의 장면이다.
승리의 웃음을 짓는 것은 레이의 절규를 상품화하는 피터와 감독이다. 도핑의 음모를 심리적으로 합리화하는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네 기록이 있잖니. 우리가 지금껏 한 일의 결과야, 그렇지? 너하고 나, 우리가 수 년 동안 해서 이뤄낸 거야. (중략) 우리가 같이 올림픽에 나가서 레이가 확실히 다 끝내고 경기하게 될 거라는 걸 약속해. 왜냐면 이게 피터 네가 원하는 거고 또 내가 원하는 거니까." 거대한 손이 선수를 줄에 매달린 인형처럼 조작하는 이미지가 떠오르는 감독의 대사가 섬뜩하게 느껴진다. 스포츠의 공정성을 해치는 도핑의 유혹으로부터 선수들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레이의 절규는 계속될 것이다.
극단 신작로의 <새빨간 스피도>는 몇 가지 점에서 아쉬웠다. 우선 '물(水)'은 수영선수인 레이의 성공을 향한 욕망이자 치유를 상징한다. 그런 점에서 대극장의 공간 제약을 감안해도, 부와 명예를 향한 레이의 욕망과 약물 중독을 치유하려는 레이의 내면이 물을 통해 드러나야 했다. <새빨간 스피도>의 작가 루카스 네이스는 등장인물의 대사 길이, 톤과 감정, 리듬과 대사 비트를 정확하게 제안할 정도로 언어(대사)에 정성을 쏟았다. 하지만 물이 효과적으로 감각되지 않는 무대 공간에서 대사로만 극 중 인물들의 심리 변화와 갈등을 드러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극과 공간의 대립하고 길항하는 관계를 역동적으로 끌어내지 못한 것이다. 조명으로 물결의 일루전을 살려내고 수영클럽(수영장)이라는 공간의 이미지를 확장하려 했으나 뒷배경으로 박제된 듯 보였다. 수영장 앞에서 극의 할 말을 다하고 끝내는 느낌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 레이와 피터의 결투 장면 정도라도 물의 이미지를 적극 활용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다. 공간적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영상과 무대 공간을 사실적으로 일원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던 것인지 아쉬움이 남는다.
두 번째는 극 중 트렘펫(에어혼) 연주 설정인데, 한 명의 연주자가 장면 사이 트렘펫을 연주하고 퇴장하는 방식을 취했다. 트럼펫 소리는 올림픽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장면에 내재된 변화를 환기하는 효과도 있었지만, 라이브로 연주된 트렘펫 연주 설정 방식은 극의 진행과는 겉돌았다. 오히려 트렘펫 연주자 그룹이 무대 뒤에서 안정적인 음악으로 연주했다면 그 효과는 한층 선명해졌을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배우들의 기량(연기)에도 불구하고 '젠더프리'를 연기로 의식하는 듯해 보였다. 여성 배우가 남성의 이미지를 부각하려 애쓰는 연기 표현은 젠더프리라는 형식만 빌려온 캐스팅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여성 배우 그대로 용해되어야 함에도 '남성같은' 이미지가 부각되는 듯했다. 젠더프리를 표방한 공연이라는 점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경지은 배우는 수영선수 레이로 몰입된 배우로서 훈련된 신체와 탁월한 감각적 연기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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