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추석에도 고향에 가지 못했다. 시골집 뜰 안 대추나무 가지의 열매들은 단맛이 밴 채로 여물고, 뒤뜰의 석류나무는 과피(果皮)가 벌어진 채로 석류가 알알이 들어찬 제 붉은 속살을 드러내며, 멧비둘기 구구대는 앞산의 산밤나무에 매달린 푸른 밤송이들은 절로 벌어져 알밤을 투두둑 털어낼 테다. 아버지가 짓고 가족과 어린 시절을 보낸 옛집은 사라지고 없다. 고향 마을의 느티나무는 무성한 가지를 드리운 채 늠름하고, 너른 들과 땅을 휘감아 돌아가는 강과 바람은 그대로이건만 고향의 새 주인들은 낯설다!
고향에서의 기억은 왜 달콤하고 아련한가? 그것은 과거를 화사하게 윤색하는 뇌의 환각작용 탓일까? 정지용의 시는 내가 오래전에 낙원에서 추방된 자임을 일깨우며 서글픔에 빠뜨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港口)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정지용 '고향').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가 우는 고향에의 기억은 달콤하고 아련하다. 그것은 지금의 고향이 아니고, 흘러간 옛날은 오늘의 괴로운 현실의 대안이 될 수가 없다.
고향을 떠난 자는 다시는 그 아늑하고 그리운 고향을 찾지 못한다. 고향을 그리는 나침반은 언제나 어린 시절의 목가적 생활을 가리킨다. 내 마음에 자꾸 향수병이 도지는 까닭은 무엇인가? 노스탤지어의 바탕은 지금 여기에 없는 것, 즉 옛날을 향한 동경과 그리움, 되찾을 수 없는 시간 회복에 대한 열망이다. 프랑스 철학자 블라디미르 얀켈레비치는 "향수병은 불가능한 것에 직면했을 때 갖는 절망이다"라고 한다. 노스탤지어는 고향이 없음이 아니라 특정 장소로 돌아갈 수 없음, 고향 회귀의 불가능성에서 발원한다. 그 불가능성은 어떤 지리적 좌표를 찾는 게 아니라 고향에서의 시간을 회복하는 일인 까닭이다. 타향을 떠나 떠도는 자는 삶을 낭비하리라는 불안에 사로잡힌 채 존재한다. 이것은 노스탤지어의 질료적 바탕이 고향 회귀의 불가능함, 그리고 방향 상실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라는 걸 암시한다.
내가 고향을 떠난 것은 열 살 무렵이다. 탈향의 세월이 쌓이면서 고향의 말도 다 잊고, 고향의 벗도 다 떠난 지금 고향은 내 마음의 지리학에서만 찾을 수 있다. "고향을 감미롭게 그리는 사람은 아직 주둥이가 노란 미숙자일 것이다. 모든 장소를 고향이라 느낄 수 있는 자는 이미 강한 자다. 전 세계를 타향이라고 생각하는 자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나는 12세기 스콜라 철학자 생 빅토르 후고의 말을 여러 책에서 만났다. 고향을 떠난 지 오래되어도 고향에 집착한다면 그는 인격의 성숙함에 이르지 못하는 영원한 미숙아에 속할 테다.
나는 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났다. 내가 원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나는 일찍이 고향을 떠났다. 고향을 잃은 채로 떠돌며 사는 동안 불신과 비관에 내 삶을 통째로 내주었다. 세상을 떠도는 자의 마음에서 빛이 꺼지고 무상함에 빠지기 쉬운 까닭은 분명 삶의 보람 없음과 기쁨의 배제의 결과인 오늘의 삭막함과 연관이 있을 테다. 나는 인격이 여문 어른의 삶을 살 수 있을까? 그것은 애초에 글러 버린 꿈일까? 나는 고향을 잃어버린 삶을 사랑한다. 아니,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고향을 잃은 삶을 사랑하지 않고 견디며 살 수 있다. 내가 이미 오래전부터 고향 없이 살아온 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탕약을 가득 채운 잔을 들이켜고 고향 상실자로 살아온 지 반세기가 넘었다. 삶은 쓰디썼다. 하지만 후회와 서글픔은 옅어지거나 사라졌다. 그렇건만 고향을 둘러싼 기억의 화사함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고토에서 몸은 멀어지건만 마음이 품은 노스탤지어는 사라질 기미가 없다. 오, 그대 다시는 고향을 찾지 못하리! 세계는 늙고, 나도 가슴에 남은 한 줌의 노스탤지어를 품고 늙어간다. 살아 보니, 늙음이 인생의 변수가 아니라 상수인 걸 알겠다. 죽음이라는 외부가 덮치기 전까지 나는 더 꼼꼼하게 늙어갈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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