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성미의 마음과 마음] 인생에 파도가 몰아칠 때

김성미 마음과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김성미 마음과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살다보면 슬픔이 얼음장처럼 단단하게 우리를 붙잡을 때가 있다. 우리가 그 슬픔 앞에 겸허해지고 수용하게 되면 슬픔은 어느새 희망의 빛이 되어 우리 삶을 축복으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슬프지만 서로 힘이 되어 주면서 위기를 잘 극복한 분들을 보면 특별한 기운을 느끼게 된다.

나는 심리적 사주팔자라는 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똑같은 상황이지만, 내 마음이 부정적인 방향이 아니라 서로를 긍정하며 슬픔도 나누고 기쁨도 나누다보면 실제적으로 사주팔자가 바뀐다고 생각한다.

신혼에 남편을 사고로 잃고 홀로 유복자를 키우며 살아온 부인이 있었다. 청춘에 위기가 닥쳤고 앞날이 아득했지만 아들을 우뚝 키워냈다. 아들을 데리고 재혼하는 것은 화통을 지고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거라 생각하고 평생 아들을 지켰다. 슬픔의 힘으로 아들을 돌보고 서로 도우며 삶을 잘 살아낸 축복된 사람이 아닌가.

삶의 어떤 시기에 들이닥쳤던 위기가 현재까지 영향을 줄 때, 트라우마라고 한다. 아주 끔직하고 충격적인 일도 있지만, 아주 사소하지만 생각보다 오래 영향을 주는 작은 트라우마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추억의 속도도 빨라지고, 어린 시절 기억이 많이 떠오르고 어떤 기억은 작은 트라우마로 남아서 유난히 힘들어지기도 한다.

3형제의 막내로 자란 중년 남자가 명절을 앞두고 불안감으로 내원하였다. 어릴 때 형들에게 많이 맞고 자라서 이번에 고향 가서 형들을 볼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리고, 아내가 부엌에서 그릇 탁 놓는 소리만 들려도 불안하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매를 드는 것보다 형이 때리던 기억이 훨씬 더 무서워서, 부모님이 집에 계신 걸 확인할 때까지는 밖에 돌아다니곤 했단다.

아무도 모르는 그 만의 트라우마다. 이유 없이 싫은 사람이 있다. 뭔가 과거에 비슷한 사람과의 안 좋은 일이 있었다면, 그 느낌이 내 어딘가에 남아서 이유 없이 싫어지는 감정 결정을 하게 된다. 크고 작은 트라우마는 미래를 불안하게 하고 오늘의 행복을 사라지게 하는 강력한 파괴력이 있다.

◆감사의 마음,고통을 이기는 최선의 방법

우리는 외상 후 스트레스로 쓰러지기도 하지만, 외상 후 성장을 이뤄내는 놀라운 힘도 가지고 있다. 위기가 찾아왔을 때 나와 주변과 어떤 식의 소통을 하느냐에 따라 트라우마로 머물지 않고 성장으로 갈 수 있다. 인류의 역사가 성장의 역사라면, 반대로 얘기하면 끊임없는 위기의 역사라는 말이기도 하다. 위기를 넘어서 성장으로 가는 프로그램이 우리 어딘가에 세팅되어 있다면, 스위치만 딱 켜면 위기에서 성장으로 갈 수 있다.

위기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성장이 일어나는 것일까. 영적 성장(spiritual change)이 일어나서 작은 것에도 행복해하고 긍정적으로 바뀌는 것이다. 영적 성장이 일어나면, 현재에 대해서 감사하는 일이 벌어진다. 감사의 마음은 고통을 이기는 최선의 방법이기도 하다.

오늘 한 가지라도 감사한 마음이 드는 마음 컨디션을 유지한다면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위기를 통해서 감사한 마음이 생기면 타인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고 그러면 관계도 더 좋아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도전 의식이 생겨나서 결국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영적인 변화의 과정에는 첫 번째는 내 상황에 대한 긍정적인 수용이 필요하다. 가끔은 관객으로 나를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내 어려운 위기를 받아들이겠다, 이해하겠다, 이런 자세가 아니라, 한 발짝 물러서서 이런 위기에서도 잘 하고 있어. 이 정도만 하면 훌륭해라고 할 수 있는 그 여유를 가지는 것이 수용이다.

두 번째는 사회적 회복 탄력성이다. 혼자 하기는 어렵다. 탄성 있는 고무공이 스트레스라는 압력을 받아서 쭈그러들었다가 다시 펴지는 현상이 회복 탄력성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공감 소통이 중요하다. 혼자 스트레스와의 전쟁을 하는 거 보다는 주변에 공감 네트워크가 많아서 내 마음의 공을 크게 키우는 게 유리하다. 공이 크면 클수록 외부 풍화에 끄떡없이 견디지 않을까.

공감에도 에티켓이 필요하다. 특히 가족이나 친구 등 가까울수록 더 중요하다. 내가 누군가의 위로를 받는다면, 상대방이 지칠 수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위로는 상당한 에너지 소모가 일어나는 일이다. 힘든 상황이 오래 지속되는 분들은 귀신처럼 공감 능력이 좋은 사람을 잘 찾아내서 달라붙는다.

그 사람의 에너지를 쭉쭉 빨아서 좀비처럼 될 수가 있다. 힘든 이야기를 계속 듣다보면 이상하게 나도 우울해지고, 독감 바이러스만큼 감정도 전염성이 강해서 가족이나 조직 전체가 다운될 수 있다.

◆내 인생의 스토리텔링 작가가 되어보라

친정 가족을 돌보느라고 몸과 마음이 다 망가진 부인이 상담을 왔다. 동생이 사업이 힘들어져서 남편 몰래 돈 빌려주고, 집이 사채에 날아갈까 봐 동생 일에 너무 개입하다보니 가정을 잘 돌보지 못했다. 나중에 남편이 알게 되어 섭섭해하고 사이가 멀어지고, 결국 친정에서도 왕따가 되고 가정은 해체될 지경에 이르렀다.

가족 전체가 기가 빨려서 좀비 가족처럼 되어버렸다. 공감의 배신이다. 비행기를 타면 안전 수칙을 승무원이 알려준다. 위급 상황에서 산소 마스크를 본인이 먼저 착용하고 나서, 옆 사람을 도와주라고 한다. 위로와 공감을 하면서 내 에너지가 얼마나 남았는지, 수혈도 받아가면서 도와야 한다.

내 인생에 들이닥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 중에, 내 인생의 스토리텔링 작가가 되어보는 것도 좋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스토리텔링 테라피를 적용한다. 똑같은 상황에서 나의 미래를 어떻게 그리고, 어떤 시나리오를 쓰느냐에 따라 사주팔자가 바뀔 수 있다는 거다. 전체적인 어떤 흐름은 있지만 나를 느끼면서 실제로 써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나도 모르게 잘 안 될거야. 부정적인 기대로 불안해했다면 긍정적으로 바꾸어서 써보는 거다. 그러면 내 마음에 영향을 주어서 내 미래가 바뀔 수 있다. 똑같은 상황인데, 내 시나리오가 나쁘면, 관계가 나빠지고, 두 번째 나쁜 결정을 하게 되고, 세 번째 도전 의식이 약해진다.

작은 일도 금방 포기를 하게 되고 결국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긍정적인 시나리오를 쓰면 관계가 좋아지고 결정도 좋아지고, 몇 번 위기가 와도 내가 도전 의식으로 뛰어넘을 용기가 생긴다. 시월의 적막한 밤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아침에는 해가 뜨고 산짐승같은 위기가 아직 찾아오지 않은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지 다시 생각한다.

가수 장기하 씨의 노래 중에 <별일없이 산다>는 노래를 좋아한다.

니가 깜짝 놀랄만한 얘기를 들려주마/아마 절대로 기쁘게 듣지는 못할거다/뭐냐하면/나는 별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 없다/나는 별일 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

어른들은 가사가 전부 반말이라 기분 나쁘다고 하겠지만, 별일 없다는 느낌이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최상의 편함이 아닐까. 반말이든 말든 이 노래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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