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용삼의 근대사] 조선 봉건시스템의 변화

대한제국 시기 인구 5년 만에 2배 늘어난 까닭
통감부때 민적법 인구통계 시작…출신·계급 상관없이 등록 의무화
592만명에서 1293명으로 급증…호적 빠진 수치 정확히 파악된 덕
총독부 땐 사유재산권 제도 도입…전국 토지·임야 근대적 측량 시행

지은, 은서, 예은, 한별, 채원…. 특이하고 아름다운 이름들이 늘고 있다. 그런데 시간을 1세기쯤 거슬러 올라가면 이름과 관련한 새로운 현실과 부딪친다. 구한말, 이 땅에 살던 사람 중 절반 이상은 이름이 없거나, 인간의 품위·품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비속어로 불렸다. 심지어 여성이나 집안 노비, 천민 등은 국가의 호적에조차 오르지 못하는 미천한 신분으로 따돌림당해야 했다.

1915년 경북 군위군 신성면 거주하는 가구의 민적 내용.
1915년 경북 군위군 신성면 거주하는 가구의 민적 내용.

조선왕조에도 호적 제도는 존재했다. 하지만, 대한제국 시절까지 호적은 혈연공동체로서의 가족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필요로 하는 역(役)을 부담시키기 위한 기초단위로 기능 했다. 역을 부담할 수 없는 여성이나 노비, 고용인(雇工), 협인(挾人, 주인집의 잡역 담당 소작인) 등 인구의 절반 이상은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었다. 조선왕조가 이들 계층을 법적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한제국은 호적상 인구와 실제 인구가 달랐고, 진짜 자기 나라 인구가 몇 명인지 알 길이 없었다. 정확한 인구통계를 확보하기 위해 근대식 인구조사를 시행한 것은 대한제국 정부가 아니라, 일본인들이 만든 통감부였다. 통감부는 1907년 헌병과 경찰력까지 동원하고, 신고를 게을리한 자는 50대 이하의 태형 또는 5원(圓) 이하의 벌금을 매기고, 거짓 신고는 6개월 이하의 징역이나 태형 또는 100원 이하의 벌금을 물렸다.

조선 중기인 1639년부터 1910년까지 인구 증감 그래프. 1909~1910년 인구가 급증한 것은 통감부가 호적에서 누락된 계층의 인구까지 정확하게 파악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인 1639년부터 1910년까지 인구 증감 그래프. 1909~1910년 인구가 급증한 것은 통감부가 호적에서 누락된 계층의 인구까지 정확하게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철저한 인구조사를 전국적으로 실시하여 호적에서 빠진 인구까지 파악했다. 그 결과 1904년 592만 명(141만 호)에 불과했던 인구가 1909년에는 1,293만 명(274만 호)으로 두 배 이상 늘었다. 호적에 빠진 신분 계층의 인구까지 정확하게 파악되자 통감부는 1909년 3월 민적법을 공포한다.

◆호적개혁과 여성 지위

대한제국·조선왕조와 달리 통감부는 모든 개인은 출신성분, 계급과 상관없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민적에 등록하도록 제도를 변경했다. 여성을 비롯하여 노비·고용인·협인 등이 호적에 등재되었다. 게다가 4대조 세계(世系)의 추심을 폐지하여 그 집안의 양반-천민 관계를 따지는 신분 판별을 없앴다. 이때부터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개인은 이름·출생 연도·가족관계·본적 등 같은 형식과 내용으로 국가에 등록되었다.

민적법에 따라 모든 개인이 적을 올리는 과정에서 이름 없는 사람에게 성과 이름을 부여하는 문제가 현실화되었다. 대한제국 시절까지 여성은 이름이 없어 태어난 달을 따서 삼월이, 사월이, 촉새년(足金連), 입분(入粉·이뿐이), 자근애기(自近愛奇·작은애기), 악이(岳伊·아기) 등으로 불렸다. 간혹 여성 이름이 존재한 예도 있었으나 호적에는 올리지 못했다.

민적법 시행으로 이 땅의 모든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성과 이름을 민적에 기재하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전체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여성에게 공식으로 이름을 부여하여 국가에 등록하도록 제도화한 것은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자유인으로서 사회적 인격으로 공인한다는 뜻이다. 일본에 의한 민적법 시행의 결과다.

조선민사령 일부 내용. 조선총독부는 조선민사령을 통해 근대적 민법을 도입하여 사유재산 보호제도, 시장경제를 도입했다.
조선민사령 일부 내용. 조선총독부는 조선민사령을 통해 근대적 민법을 도입하여 사유재산 보호제도, 시장경제를 도입했다.

노비나 천민은 주인의 성(姓)을 따르거나, 개인이 원하는 성을 선택하여 정했다. 이 과정에서 김·이·박 등 양반 성이 선호되면서 3개 성이 전체 인구의 45%를 넘는 현상이 발생했다. 게다가 양반들은 집안 노비에게 말똥이(馬同), 개똥이(介同), 도야지(道也知), 쇠돌(金乭), 놈아(老馬), 개불알(皆鳳), 뭉치(夢致) 같은 천한 이름을 붙여 하대했다.

1910년 한일병합 후 일본인들은 노비·천민도 사람인데 천한 이름으로 하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 법무국은 '조선 호적 및 기류 예규'를 제정하여 이름으로 인정할 수 없는 칭호를 명기했다. 가축, 가축의 분뇨, 물상, 태어난 달(月)을 표방하는 등 인간다운 품위를 갖추지 못한 이름은 민적 등록이 불가하도록 제도화한 것이다.

노비·천민도 양반과 다름없는 품위 있는 작명을 제도화함으로써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한 사적(私的) 자치의 주체로서의 개인임을 법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다.

◆사유재산제, 시장경제 기반조성

『한국경제사』의 저자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는 조선총독부 통치 시절인 1912년 4월 공포된 조선민사령을 통해 한국에 민법이 도입된 사실을 밝혔다. 즉 민법 제1조에 "사권(私權)의 향유는 출생으로부터 시작한다", 제2조 "외국인도 법령이나 조약에서 금지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권을 향유한다"라는 사실을 명시하여 조선에 거주하는 모든 인간은 사권을 향유하는 주체임을 법적으로 공식 인정(法認)했다.

민법과 기타 법률에 의해 일본으로부터 재산권 제도가 도입되었다. 민법의 시행으로 인해 반상의 신분제도가 법적으로 폐지되었고, 모든 종류의 근대적 재산권 제도가 성립되었다. 재산권의 절대성을 보증·보호하기 위해 등기제도가 요구되었다.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은 왕토에 존재하는 모든 땅과 산림은 국왕 소유라는 토지 왕토설을 신봉했다. 전답과 대지에 한해 사실상의 사유재산권을 인정했지만, 재산권을 제3자에 대한 절대적 권리로 증명하는 법적 제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전답과 대지를 제외한 산림·광물·수산물은 사유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엄격한 반상의 신분제하에서 사회적 약자인 상민·천민·노비들의 재산은 언제든 양반 관료에 의한 수탈 대상으로 전락했다.

근대적 등기제도 시행을 위한 토지조사사업을 위해 토지를 측량하는 모습.
근대적 등기제도 시행을 위한 토지조사사업을 위해 토지를 측량하는 모습.

사유재산에 대한 소유권(점유권·소유권 등)을 법적으로 보증·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인 조선부동산 등기령이 1912년 3월부터 시행되었다. 이를 위해 전국의 토지와 임야에 대한 근대적 측량이 시행되었는데, 이것이 토지조사사업이다. 조선총독부의 등기령 때문에 개인의 사유재산 소유권이 법적으로 보장받게 되었다. 이로써 조선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로의 전환 토대가 형성됐다.

물론 이 조치는 조선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반도에 진출한 일본인 지주·자본가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 제도 시행 결과 조선인도 같은 혜택을 입게 되었다.

김용삼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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