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미술가들은 의뢰받아 초상화를 그리는 일이 잘 없지만 17세기나 18세기의 화가들은 생계 수단으로서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고 한다. 이는 영국 시골 저택의 벽면을 빼곡히 메우는 초상화를 봐서도 알 수 있다. 특이한 점은 일반적으로 그런 초상화의 모델들은 그 저택을 소유한 가족이나 조상이겠거니 하는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초상화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영국 의회의 역사를 다루는 한 학술 사이트에 게재된 재미있는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스튜어트 시대 후기부터 조지안 시대의 초기에 걸쳐 영국에서는 힘을 꽤 쓴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초상화를 교환해서 각자의 집에 전시하는 일들이 많았는데, 이는 친족 관계, 교우 관계, 또는 정치적 관계를 돈독히 하고자 하는 중요한 활동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우정은 단순히 같은 생각의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만은 아니었으며, 효용성에 기반한 사회적 의무로 널리 이해됐다. 이러한 관계는 선물 교환을 통해 강화됐고, 이는 호혜와 상호 간의 의무로서 되풀이됐다.
따라서, 우정은 '사적인' 활동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 반대였었다. 친구, 가족, 정치, 사업 사이에 구분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었다. 결혼은 사회적, 정치적 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계약이었고, 사적인 친족 사이의 결속은 공공연한 협력과 출세를 가능하게 했다. 따라서 초상화는 종종 정치 네트워크에 필수적인 요소였으며, 구성원을 하나로 묶어 유대감을 강화하고, 자신의 협력자와 소속된 집단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
엘리트 집단에서는 친구들끼리 서로의 초상화를 주고받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웬만히 돈이 많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초상화는 그 자체로 선물일 뿐만 아니라 우정을 상징하는 가시적인 기록이었기에, 집의 공간 중 손님들이 드나드는 곳에 걸려 집주인의 조상들과 현재의 협력자들을 살펴보도록 했다. 이러한 초상화 보여주기는 '귀족들의 인맥도'인 셈이다.
일반적으로 그림의 예술적 가치보다는 모델의 신분이 더 중요했지만, 화가의 선택은 종종 소속된 네트워크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같은 정치 또는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특정 예술가를 후원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1690년대에 스웨덴의 초상화 화가 마이클 달은 휘그당(절대왕정이 아닌 입헌군주제와 의회주의를 지지했던 정당) 귀족과 덴마크의 조지 왕자 지지자들의 후원을 자주 받았다고 한다.
또 다른 예는 1720년대 가장 유명한 정치 집단이었던 월폴, 타운센드, 펠햄 가문이 초상화 화가 찰스 저바스를 후원한 것이다. 이 세 가문은 찰스 타운센드 자작의 결혼을 통해 연결됐었다. 타운센드의 첫 번째 부인 엘리자베스는 뉴캐슬의 초대 공작 토마스 펠햄 홀스와 헨리 펠햄의 누이였다. 1711년 엘리자베스가 사망한 후 그는 노퍽에 사는 이웃인 로버트 월폴의 누이 도로시와 결혼했다. 나중에 월폴이 재무장관, 타운센드가 북부 담당 국무장관, 뉴캐슬이 남부 담당 국무장관을 맡으면서 이들은 내각을 장악하게 된다(여기서 북부와 남부는 유럽을 구분해 나눈 영역을 말한다). 이 정치적 동맹은 점점 악화해 1730년 5월 월폴과 뉴캐슬이 타운센드를 사실상 은퇴하도록 강요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이후 타운센드와 월폴은 다시는 말을 섞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날 소셜미디어에 고관대작들과 찍은 사진을 포스팅하는 것이 집안에 남의 초상화 거는 것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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