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학 속 호모에스테티쿠스] <19> 김승옥의 '무진기행': 안개의 서정미학

이경규 계명대 교수

안개. 클립아트코리아
안개. 클립아트코리아
이경규 계명대 교수
이경규 계명대 교수

제목만 봐도 '무진기행'의 주인공이 안개라는 것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현실에 없는 도시를 배경으로 만들어 쓰면서 그 이름을 굳이 무진(霧津), 즉 '안개 나루'로 의미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안개는 어떻게 이미지화되고 있는가? 그것은 "적군에게 완전히 포위당한" 것 같은 절박함이고 "한 서린 여자 귀신의 입김" 같은 처절함이다. 이 극단의 설정으로 의도하는 바는 뭘까? 이 정도면 뭘 하든 용납되지 않을까, 하는 사전 포석이다. 적군에 포위된 자가, 혹은 한 맺힌 원귀가 무슨 일을 하든 누가 뭐라 하겠는가.

과연, 서울에 아내를 두고 무진으로 기행 온 윤희중은 별 갈등 없이 바람을 피운다. 갈등은커녕 무진의 서정적 풍경을 배경으로 바람을 낭만화한다. 그가 음악 선생 하인숙과 첫 데이트를 하던 밤을 어떻게 수감(隨感)하는지 보자.

우리는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검은 풍경 속에서 냇물은 하얀 모습으로 뻗어 있었고 그 하얀 모습의 끝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안개 짙은 냇가를 걷는 두 사람에게 경계심 같은 것은 없다. 조금 더 걸어가니 논에서는 개구리가 울어댄다. 희중은 개구리울음이 "비단 조개껍질을 한꺼번에 맞비빌 때 나는 소리"에서 "수많은 별의 반짝임"으로 전환되는 미적 공감각을 체험한다. 청각과 시각의 생물학적 경계마저 밤안개의 서정에 허물어지고 있다.

서울에 가고 싶다는 인숙의 말에 서울엔 책임밖에 없다고 희중이 말하자, 인숙은 대꾸한다. "여긴 책임도 무책임도 없는 곳인걸요." 안개 마을에선 그런 건 구분은커녕 존재하지도 않는다. 행여 느낄지도 모를 남자의 책임감을 일찌감치 여자 쪽에서 내려준다.

다음 날 오후, 하늘은 안개 낀 것처럼 흐릿한데 두 사람은 바다로 뻗은 방죽을 걸으며 두 번째 데이트를 한다. 희중이 여자의 손을 잡으니 "손바닥과 손바닥의 틈으로 희미한 바람이 새어나간다." 저녁에 그는 무진에 오면 얻어 들던 방에서 인숙과 섹스를 한다. 망설일 겨를이 없다.

나는 그 방에서 여자의 조바심을, 마치 칼을 들고 달려드는 사람으로부터, 누군가 자기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주지 않으면 상대편을 찌르고 말 듯한 절망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칼을 빼앗듯이 그 여자의 조바심을 빼앗아 주었다.

원귀의 절망 같은 여자의 갈망을 거두어 준 희중은 혼잣말을 내뱉는다. "흐린 날엔 손을 내밀고 그 손을 잡는 사람이 있으면 좀 더 가까이 끌어당겨 주기로 하자." 심지어 사랑을 고백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사랑한다'라는 국어의 어색함에 입을 다문다. 무진에선 필요하지 않는 말이다.

다음날 희중은 아내가 보낸 전보를 받고 말없이 무진을 떠난다. 대신 편지를 쓴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저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도 전달되지 않는다. 희중은 편지를 찢어버린다. 안개 속에 무슨 글을 남기나. 서울로 가는 버스 안에서 희중은 창밖으로 지나가는 팻말을 본다.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개 걷히듯 무진은 뒤로 사라진다.

무진기행, 저 안개 나루터에 피어오른 짙고 아련한 서정, 어떤 이는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감수성의 혁명'이라 했다. 결국 불륜 이야기 아닌가 하겠지만 쉬 도덕적 언사가 나오지 않는 이유다.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