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예프스키의 궤적
하마스와 이스라엘 공방 뉴스를 보며 필자는 뤽 베송 감독의 '제5원소' 식 절망을 느낀다. 영화에서 밀라 요보비치가 폭력에 잠식된 인간의 역사를 인지한 뒤 '인간이 존속할 가치'에 대해 회의하던 그 장면처럼. 이어서 뒷배라는 이란과 헤즈볼라, 푸틴에서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까지 자연스럽게 떠올리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나른했던 며칠과 센나야광장의 라스콜리니코프를 생각한다.
'찌는 듯이 무더운 7월 초 어느 날 해질 무렵, S골목의 하숙집에 살고 있던 한 청년이 자신의 작은 방에서 거리로 나와 왠지 망설이는 듯한 모습으로 K다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학생 잡지 부록 '가난한 사람들'을 밤새워 읽고 바로 집어든 그의 두 번째 책이었다.

가난한 9등 문관 마카르는 연인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다. '아아, 이 무슨 부질없는 넋두리입니까? 정말 당신은 기어이 브이코프 씨와 함께 그 허허벌판으로 떠나시겠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시지 않겠단 말이지요? 아아, 바렌카…' 이 책은 내게 그의 허름한 외투에서 떨어지던 단추가 상관의 책상 위를 도르르 구르던 소리로 각인되었고 러시아문학을 향해 문을 열어 주었다.
모스크바에서 야간열차로 끝없는 자작나무숲을 보며 9시간 만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글을 쓰고 산책하며 거주했던 공간, 2014년 7월 초 아침 공기는 다소 싸했다. 폰탄카 샛강 옆 공병학교에서 데카브리스트 광장, 마르스 광장, 미하일로프 광장을 걸으며 청년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과 대화했을 것이다. 오늘 밤 나도 백야(白夜)에 홀려 이 수많은 수로가 있는 골목들을 헤매 다닐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도시에서 스무 번 이상 이사를 다녔다. 골목 모퉁이의 이, 삼층집, 구석방, 다락방, 아마도 집에서 보내 준 돈이나 선불로 받은 원고료를 도박으로 날려 후미진 구석을 찾아다녔을 것이다. 그 많은 셋집 중 1971년 탄생 150주년 기념으로 만든 도스토예프스키박물관에 들렀다. 좁고 답답한 이곳 창문을 통해 사원과 시장 그리고 오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다가 구석진 골방의 책상에서 웅크려 그는 글을 썼을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표트르대제가 열고 예카테리나 2세가 꽃피우다
상트페테르부르크, 1991년까지 구(舊) 소련의 레닌그라드로 불리던 곳. 러시아를 제국으로 출범시킨 '차르' 표트르대제(大帝)가 스웨덴에서 탈환해 북유럽의 베네치아처럼 기획 조성한 바로크 도시다. 1703년 표트르대제가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이곳으로 옮긴 과격하고 급진적인 개혁 이전의 로마노프 왕조는 사실상 동양인들에게는 서방, 서유럽에서는 동방으로 어정쩡하게 취급받고 있었다.
그가 네바강 하류를 정비해 수로를 만들고 농노들의 뼈를 갈아 거대한 돌로 메운 습지 위 바로크 건물들을 세우자 중세의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듯한 러시아를 전 유럽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전체적이며 급진적인 개혁은 당대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18세기 러시아에선 그 누구도 가난과 무지, 미신과 술에서 나오고 싶어하지 않은 까닭이었다. 심지어 신실한 러시아 정교도였던 아들의 이해도 받지 못했다. (황태자 알렉세이는 제위를 포기하고 감옥에서 죽었다.)
무리한 전쟁과 패배, 수차례의 반란 위기 또 아들마저 잃은 인간적 비극까지 겪은 탓이었을까. 위대한 표트르대제는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고 러시아는 1762년 예카테리나 2세가 즉위할 때까지 37년간 통치자가 여섯 번이나 바뀌는 복잡한 권력다툼이 벌어졌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표트르대제가 그토록 열망한 러시아의 근대를 연 것은 그의 직계가 아니라 외손 표트르 3세의 독일 태생 황후 예카테리나 2세였다.

그녀의 치세(~1796년) 동안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아름답고 웅장한 현재의 외관이 완성되어 러시아 역사상 가장 화려한 귀족들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자위 반 타위 반 무능한 남편을 폐위시키고 '차리나'가 된 그녀는 네바강가에 프랑스 베르사유궁전을 본 딴 겨울궁전(현재의 에르미타주미술관)을 완성하고, 자신의 혈통에 대한 러시아 국민들의 거부감을 없애고자 거대한 표트르대제의 청동기마상을 성 이삭 성당 앞에 세웠다.
예카테리나 2세는 재위 34년 동안 농상공업 진흥으로 국력을 향상시키고 외치에도 대성과를 거두어 강력한 권력을 쥐고 절대군주제를 확립했다. 서유럽처럼 근대화에 발 맞춰 몽테스키외, 볼테르 등 계몽주의 철학자 예술가, 과학자들을 초빙해 문화예술 발전에도 박차를 가했다. 또한 왕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막대한 유럽 예술품 컬렉션을 사들여 겨울궁전 옆 작은 별궁(현재의 소(小) 에르미타쥬)을 지어 전시했다.
볼테르는 그녀의 치세를 이렇게 술회했다. '과학, 예술, 이성이 북쪽에서 자라나고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국민의 90%가 농노인 유럽에서 가장 늦게까지 존속된 러시아의 봉건제는 그녀가 꽃피운 근대성을 자양분삼아 곳곳의 반란으로 나타났다. 더군다나 1789년 프랑스 대혁명에 위기를 느껴 농노제를 극렬하게 강화해 국민들의 증오를 사기도 했다. '농민들이 지식을 쌓고 자유를 얻는다면, 그것이 바로 곧 러시아 황실의 종말이 될 것이다.' 그녀가 국민들을 억압하며 남긴 말이다.

◆에르미타주미술관
예카테리나 2세가 사들인 예술 소장품은 방대했다. 뒤를 이은 차르들은 그 누구도 그녀만큼 위대한 공적을 남기진 못했지만 예술품만은 그 수가 350만점에 달할 만큼 계속 수집했다. 러시아는 이 수집품들이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우에 비해 약탈품이 아니라는데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은 좀 다르다. 사회주의 혁명 당시 기업가들에 대한 재산 몰수와 나치 전리품도 상당하며 심지어 구(舊)소련 시절 외화부족으로 외국으로 팔아넘긴 사례도 있다고.

우리가 익히 아는 역사대로 20세기 초 로마노프왕조가 몰락한 뒤 이 수많은 소장품들은 구(舊)소련에 의해 에르미타주 미술관을 비롯해 모스크바, 푸시킨 등 전역에 걸쳐 일반에 개방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현재 에르미타주 본관으로 사용되는 겨울궁전, 구(舊)에르미타주, 신(新)에르미타주, 소(小) 에르미타주, 에르미타주 극장, 1,020여 개의 방, 총 길이 27km의 전시로에 나누어 전시하고 있다.
황금빛으로 도배된 러시아 황실은 홀들만 해도 화려하기 짝이 없는데 전시된 고대 이집트 유물부터 그리스, 로마, 르네상스, 바로크, 인상주의 작품들은 황홀 그 자체였다. 그 중에서 125개 홀을 차지한 서유럽 전시실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루벤스, 렘브란트, 카라바조는 팔랑팔랑 날개를 펴고 날아다녀야 그나마 모두 볼 수 있다.

역시 몇 초씩 보아도 작품을 모두 보는데 150년이 걸린다는 에르미타주의 전설대로 라파엘로를 모사한 천정으로 유명한 신(新)에르미타주에는 일정 관계로 들어가질 못했다. 모네, 르느와르, 세잔, 고흐, 고갱, 드가, 마티스, 샤갈, 피카소 작품들이 즐비하다는데 도스토예프스키가 '우리에겐 러시아와 유럽, 두 개의 조국이 있다.'라고 한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 그리고 트레티아코프를 비롯 판타스마고리아(주마등)식으로 일별하고 만 러시아 미술관들을 다시 한 번 찬찬히 파악하기 위해 아쉽지만 부득이하게 남겨두고 왔다. 인간이 존속될 가치에는 분명히 예술도 포함된다 믿는 나는 오늘도 전쟁 종식을 간절히 빈다.

박미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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