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려갈 거예요. 엘리베이터 버튼 1층 누르세요."
안대로 눈을 가려 앞은 암흑이었다. 쭈뼛거리며 손을 뻗었다. 차가운 것이 닿았는데 그게 버튼인지 그냥 벽인지 알 수 없었다. 버튼 같은 것이 피부로 느껴졌지만 내려가는 버튼인지, 올라가는 버튼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그렇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찾는 데만 2분이 걸렸다.
매년 10월 15일 '흰지팡이의 날'이다. 흰지팡이의 날은 세계시각장애인연합회가 시각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1980년 지정했다. 지난 11일 오전 10시 매일신문 취재진이 보행지도사 자격증이 있는 김창연 대구시장애인연합회 부회장의 도움을 받아 안대를 쓰고 대구도시철도 3호선 명덕역에 가보기로 했다.
◆5분 잡았을 뿐인데 손목이 욱신
밖으로 나오니 안대로 가린 눈에 햇빛이 들어왔다. 빛이 느껴지는 것이 반가우면서도 그 외에는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없어 막막했다. 김 부회장은 "시각장애인이라고 하면 보통 깜깜한 암흑을 본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전맹 시각장애인보다는 빛은 인지하되 아주 최소한의 윤곽 정도를 알아볼 수 있는 경우가 더 많다"고 설명했다.
취재진의 오른손엔 흰지팡이가 있다. 흰지팡이는 시각장애인의 자립과 성취를 상징한다. 흰지팡이로 길 위의 장애물을 가늠하며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보행하는 데서 착안했다.
김 부회장에 따르면 흰지팡이를 쓰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 보도 양쪽을 두 번 찍는 '2타법', 벽을 찍은 후 보도 양쪽을 찍는 '3타법' 등이다. 유도블록을 따라 걸어가면서 취재진이 가장 많이 쓴 타법은 '터치 앤 드래그법'이었다. 종으로 나있는 블록을 중심으로, 왼쪽을 찍고 횡으로 긁는 방식이다. 그래야 울퉁불퉁한 선형 유도블록을 따라 잘 걷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걸으면서 바닥을 찍고 딱딱한 블록을 긁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5분이 지나니 팔목이 아팠다. 유도블록 양옆의 일반 보도블록은 울퉁불퉁했고 지팡이가 자꾸 걸렸다. 어느 보도블록은 너무 돌출돼있어 유도블록인지 일반 블록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직진하다 오른쪽 무릎을 어딘가에 부딪혔다. 선형 유도블록을 잘 따라왔을 뿐인데 당혹스러웠다. 잠시 안대를 벗고 확인하니 자동차였다. 차는 선형 유도블록을 침범해 인도에 주차돼 있었다. 김 부회장은 "유도블록을 침범해 주차된 차 때문에 시각장애인이 차에 손상을 입혀 소송에 걸리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불법 주정차로 '흰지팡의날' 무색
한 번 부딪히니 마음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방해물 생각에 지팡이는 더 분주해졌고 팔은 고통스러울 만큼 아팠다. 그때 지팡이에 뭔가가 걸렸다. 볼라드였다. 주차를 금하기 위해 인도에 설치한 기둥이다. 볼라드는 유도블록과 30cm 이상 간격을 확보해야 한다. 김 부회장은 "차가 인도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한 볼라드에 시각장애인이 타박상이나 골절까지 당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강조했다.
5분 정도가 지나자 점자 유도블록이 느껴졌다. 점자 유도블록이 있으면 길이 좌우로 갈라진다거나 횡단보도가 있다는 신호다. 횡단보도에는 유도블록이 없다. 오로지 감각에 의해서만 직진해야 한다. 앞이 안 보이는 상태에서 직선 보행을 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직선보행법도 따로 익혀야 한다.
대구시시각장애인연합회 사무실에서 도시철도 3호선 명덕역까지는 450m가 조금 넘는 거리로 비장애인 성인이면 도보로 5분이면 갈 수 있다. 그러나 안대로 눈을 가리니 약 35분이 걸려 왕복했다. 명덕역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탑승표를 끊는 데까지 20분이 걸렸고, 다시 나와 협회 사무실로 돌아가는 데 20분 가까이 걸렸다.
날이 제법 쌀쌀했는데 목덜미와 등에서 땀이 났다. 잔뜩 긴장한 탓에 산을 등반한 기분이었다. 유도블록, 엘리베이터의 안내 음성, 점자에 의존하며 걷는 것은 매초 공포와 싸우는 일이었다.
김 부회장은 "시각장애는 다른 신체 장애에 비해 생활의 제약이 더 크다"며 "유도블록, 점자, 안내 음성 등 비장애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치는 것들이 시각장애인들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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