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장자(莊子)와 허주(虛舟)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선거가 끝날 때마다 정치권에서는 '水可載舟亦可覆舟'(수가재주역가복주)라는 공자(孔子)의 말이 인용되곤 한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또한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군주의 도가 세상의 이치와 통한다면 순항하겠지만 자칫 물길을 거스르다가는 배가 뒤집어질 수도 있다.

노태우에 이어 김영삼 대통령을 당선시키면서 우리 시대 최고의 '킹메이커'로 평가받고 있는 고 김윤환 전 의원은 '허주'(虛舟·빈 배)라는 '호'(號)를 좋아했다. 스스로를 민심의 바다를 항해하는 배(舟)로 여기면서 아무도 태우지 않겠다는 무소유의 권력의지를 드러냈다. 2인자를 인정하지 않고 권력을 공유하지도 않는 권력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알던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당선되자 '공신' 대접을 요구하는 대신 아예 한동안 외국에 나가 귀국하지 않았다.

정치의 시간이 다시 돌아왔다. 정치권의 화두는 '공천 개혁'이다. 전쟁에 내보낼 참신하고 유능한 인재를 찾아 내서 내놓느냐에 따라 총선 결과가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등 양대 정당은 대통령이나 당 대표 등 실세와의 친소 관계를 살피는 '눈치 공천'의 기미가 뚜렷하게 엿보인다. '친윤과 비윤' '친명과 비명'이 공천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재포장될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민심의 바다에 띄울 배를 건조하는 책임을 지고 있는 공당이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와의 관계만을 기준으로 인재를 내놓게 된다면 민심의 바다는 그 배들을 뒤집어 버릴 것이다. 대통령을 탄핵하고 지난 총선에서 여당에 180석을 몰아 준 민심은 불과 2년여 만에 이재명 후보가 탄 대선호(號)를 전복시키면서 성난 민심을 표출하지 않았던가?

총선을 앞두고 마지막 선거였던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는 정치권에 던지는 시그널이다. 그 신호를 제대로 해석하는 정당은 총선에서 웃겠지만 그렇지 않고 아전인수 격으로 이해한다면 총선 결과는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할 수도 있다.

허주와 장자(莊子)의 미학은 단순하다. 비우라는 것이다. 스스로를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나를 내려놓고 국민을 바라보고 나아가라는 것이다. 권력의 속성을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권력의 속성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돈과 권력은 잡으려고 할수록 멀리 도망가는 속성이 있다.

부산에서 3선의 관록을 쌓은 하태경 의원의 서울 출마 선언은 그래서 신선하다. 공천만 받으면 당선되기 쉬운 소위 '텃밭' 지역구를 버리고 서울에서 출마하겠다는 결심은 스스로를 버리고 비우고자 하는 장자의 미학과 다르지 않다.

국민의힘 내부의 시선은 이제 '친윤' 그룹 좌장으로 불리는 3선 장제원 의원으로 향한다. 장 의원은 김기현 대표를 당선시킨 당내 최고 실세로 통한다. 그래서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비치는 실세의 결단은 총선 구도를 좌우할 최대 변수다.

장자의 미학은 야당에도 마찬가지다. 구속은 가까스로 면했지만 대장동과 백현동 개발 의혹, 성남FC 후원금 의혹 및 공직선거법 위반 등으로 기소돼 재판을 받으며 사법 리스크에 노출돼 있는 이재명 대표가 장자의 미학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가 대표직을 내려놓고 모든 의혹을 해소하고 당당하게 돌아와도 시간은 충분하다. 그러면 총선은 '야당 판'이 될 수 있다. 국민은 스스로를 희생하는 지도자를 원한다.

didero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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