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을 탐구하는 학도들에 귀중한 자리로 되어있는 대구도서관은 관계자의 무책임한 처사로 인해 대량장서가 비바람을 맞아 썩어간다는 해괴한 사실이 있어 일반의 탄식을 불금케 하고 있다. 즉 부립도서관에서는 열람자에게 항시 대여하고 있는 각종 서적 1만 7천 여권을 담당하고 있던 동관 서적은 그전부터 습기와 폭풍우로 서적 보관상 부적당하다는 말이 있어 오던 중 ~'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8월 13일 자)
대구도서관에서 해괴한 일이 일어났다. 해방 후의 대구부립도서관은 1947년 5월 6일 개관했다. 1919년 경북도청 구내의 뢰경관에서 개관한 도서관은 1940년에는 조양회관으로 이전했다. 일제강점기 도서관의 재탄생이 아니라는 의미로 당시 언론은 속관 대신 개관으로 표시했다. 해방 직후에는 대구도서관의 인장이 찍힌 책 수거 운동을 벌일 정도로 서적이 부족했다. 도서관이 문을 연 여름부터는 신간 잡지와 논문, 영어책 130권 등이 속속 들어오는 등 도서관의 면모를 갖춰갔다.
대구도서관은 문을 연 이후 습기와 폭풍우 같은 재해 대비에 허술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1948년 여름에 폭풍우를 동반한 태풍이 대구를 엄습했다. 아니나 다를까. 도서관 천장과 벽을 타고 빗물이 흘러들었다. 빗물이 지나간 책은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곰팡이가 피고 얼룩이 졌다. 빗물로 폐지가 된 책은 이공학 서적 300권과 철학 서적 200권 등 모두 500권에 달했다. 도서관에 보관하던 책이 한순간에 폐지로 못쓰게 되자 해괴한 일로 여겨졌다. 도서관의 역할을 저버렸다는 빗댐이었다.
물난리로 수백 권의 책을 버렸다는 소식에 부민들의 비난은 거셌다. 대구부에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소리도 들렸다. 책임소재를 둘러싼 논란이 불거진 건 당연했다. 도서관 직원들은 대구부에 책임을 돌렸다. 예산이 없어 침수 예방 대책을 세울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런 해명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물이 새는데도 제때 책을 옮기지 않고 손 놓은 도서관 직원들의 태만을 질타하는 소리에 부당국의 책임론은 묻혔다.
대구도서관은 개관하자마자 열람 열기가 뜨거웠다. 날마다 평균 200~300명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해방 전의 40~50명에 비해 크게 늘었다. 좌석이 100석에 불과했으므로 두세 번의 열람객 순환이 이뤄지는 셈이었다. 좌석을 150석으로 늘리고 야간 개관을 서둘렀다. 이용객은 단연 학생이 많았다. 여자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남자 일색이었다. 당시 대구 앞에 붙었던 향학열의 대구라는 수식어는 남자에게만 해당되었다.
'1월 중 대구도서관 관람자 통계에 나타난 대구독서계를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총관람자는 649명 그중 여자는 불과 10명이라는 어느 사회에서도 볼 수 없는 수치를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민족이 글과는 인연이 먼 것을 증명함이요 또 그만큼 문화에서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말하고 있다.' (남선경제신문 1949년 2월 13일 자)
도서관을 바라보는 시선은 한 해 만에 크게 엇갈렸다. 대구의 향학열을 칭송하며 문화도시 대구로 추어올린 이야기와는 딴판이었다. 이유는 도서관 열람객 숫자가 줄어든 탓이었다. 도서관을 찾는 이용객 수는 문화시민의 수준을 평가하는 잣대로 통했다. 1949년 1월에는 매일 240명가량 도서관을 찾았다. 한해 전보다 많게는 50명 이상이 줄었다. 한 명도 없던 여자는 10명으로 집계됐다. 그럼에도 전체숫자가 줄어든 것을 두고 문화도시 대구의 위상이 뒷걸음질 치고 있다는 지적을 했다.
도서관을 찾는 이들의 책 선호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바뀌었다. 사학 관련 책을 가장 많이 봤고 수학과 문학, 어학, 교육 관련 책이 뒤를 이었다. 과학책이 순위에 없자 이를 걱정하는 소리가 나왔다. 과학 발전에 대한 우려의 질타였다. 해방 직후에는 수학과 물리, 화학, 생물 등 이학 계통의 책 선호도가 높았다. 일본의 패망을 가져온 원자탄 관련 책에 관심이 많았던 이유와도 맞물려 있었다. 차츰 열람객들의 책 선호도는 종교, 교육, 철학, 정치, 법 윤리학 등으로 다양해졌다.
1949년에는 대구부청에 불이 났다. 도서관이 부청의 업무공간으로 변했다. 도서관은 이듬해 달성공원으로 옮겨 문을 열었다. 1950년 2월의 개관 22일 차에 열람자는 4백 명에 이르렀다. 학생이 160명으로 여전히 다수를 차지했다. 도서관을 자주 찾았던 관공서 직원과 회사원이 줄어든 대신 무직과 상업, 공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늘었다. 여자는 여전히 가뭄에 콩나듯 드물었다. 여자들이 남자보다 공부하기 어려운 사회적 여건이 좀체 바뀌지 않았다.
해방 후 대구도서관서 수백 권의 책이 폐지로 못쓰게 되자 해괴한 일로 비유했다. 도서관에서 그런 일은 다시 보기 힘들 것이다. 대신 책 읽기 수월하지 않은 시대에 해괴한 일은 다른 버전으로 남아있다. 이번 가을에 책 한 권이라도 손에 쥐었다면 말이다.
박창원 계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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