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홍성걸 칼럼] 법치주의와 부패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

얼마 전, 한 시민 단체가 주최한 '법치주의와 부패'를 주제로 한 세미나에서 국제적 다분야 연구 단체인 세계정의프로젝트(World Justice Project·WJP)의 법치주의 수준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WJP는 정부 권한의 제한, 부패 수준, 정부의 공개성, 기본권, 질서와 안전, 규제, 민사 및 형사 사법 제도 등 8개 분야, 44개 하위지표를 기준으로 법치주의 수준을 측정하는데, 2022년 평가에서 한국은 140개 측정 대상 국가 중 19위, 아태지역에서는 5위를 기록하여 상위권에 속한다. 법치 수준에 큰 영향을 미치는 부패지수의 경우 한국은 지난 2017, 18년 이후 행정부와 사법부의 부패지수가 소폭이지만 상승했으나 경찰과 군, 입법부의 부패지수는 나빠졌다. 특히 입법부의 부패지수만 평균보다 매우 낮은 수준으로 140개 국가 중 무려 73위를 기록했고, 이는 44개 측정지표 중 가장 낮았다.

입법부의 부패 수준이 낮다는 것은 결국 정치권의 부패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이다. 하긴 인사청문회와 국정감사, 대정부질문, 그리고 각 상임위 활동 등에서 보이는 국회의원들의 모습은 시정잡배만도 못 한 이전투구의 모습이 대부분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대변인들이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는 모습을 보이고, 수많은 현수막은 서로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다. 언론 방송에 출연해 각당의 입장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선택적 인지와 비논리적 강변으로 사실상 거짓말로 국민을 호도한다.

부패 수준의 국제 비교보다 더 심각한 것은 우리 사회 내부의 부패에 대한 무감각함이다. 머리 좋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독특한 형태의 부패를 창조했다. 뇌물이나 급행료, 정치자금 등 직접적으로 금품을 주고받는 1차원적 부패도 있지만, 최근 심각한 문제로 불거진 전관예우를 통한 각종 부패 카르텔 같은 2차원적 부패도 있다. 겉모습은 합법적인 형태를 띠지만 결과적으로 불법적 이익을 주고받는 3차원적 부패도 심각하다. 국회의원들에게 쪼개기 후원을 한 것이나 현직에 있을 때 적당히 봐주고 퇴직 후에 혜택을 받는 장기적 교환 형태의 부패도 있다. 계약서가 없어도 규제 권한을 갖는 기관과 기업들 간의 구조적 신뢰에 바탕을 둔 부패다.

이런 부패는 대부분 특정 권한을 바탕으로 경제적 이익을 교환하는 관계에서 발견되지만, 아무런 권한이나 지위가 없어도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4차원적 부패는 우리 사회만의 특징인데, 대표적 사례가 보험사기다. 아주 가벼운 접촉 사고에도 운전자는 뒷목을 잡고 입원하기 일쑤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가족 전체가 보험사기에 나서기도 한다. 지난해 적발된 보험사기만 1조800억 원이 넘을 정도로 보편화되어 있다. 어디 이뿐인가. 정부 지원금은 눈먼 돈으로 여겨 못 받으면 바보라고 생각한다.

이 모든 유형의 부패를 관통하는 것은 바로 '거짓말'이다. 한국인의 정서적 특징으로 알려진 '한'(恨), 혹은 '정'(情)과 함께 거짓말은 역사 속에서 무수히 발견된다. 한국인이 거짓말에 무감각해진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이라는 대국 옆에서 살아가기 위한 생존 논리였기 때문이다. 늘 우리를 위협하는 중국의 요구를 다 들어주다가는 나라가 위태로웠던 시기에 한국인은 겉과 속이 다른 거짓말을 통해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부에서도 권력자나 가진 자를 속이고 작은 이익을 취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아니 오히려 칭찬받을 일처럼 여기게 되었다.

일찍이 도산 안창호 선생은 조선은 거짓말 때문에 망했다면서 죽어도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셨다. 도산은 상해사변 때 임시정부 요인들이 모두 피난갈 때 시내로 들어가다가 일본군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된 후 서대문형무소와 종로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당해 결국 돌아가셨다. 당시 도산이 시내로 들어간 이유는 임시정부 직원의 아이 생일에 케이크를 사 가지고 오겠다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려는 의지였다. 스스로 죽어도 거짓말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자신이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모한 그의 행동이 옳지 않았다고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그만큼 거짓말은 우리 민족이 극복해야 할 가장 큰 문제였다.

법치주의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근간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이슈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각종 부패 의혹에 대한 사법적 판단도 결국 그의 거짓말 여부에 달려 있다. 여든 야든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거짓말하는 정치인을 영원히 퇴출시키는 것만이 이 나라를 부패로부터 지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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