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각을 다투는 범죄 현장에 출동해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할 경찰들이 주취소란과 악성민원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상습주취자가 지구대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행패를 부려도, 경찰은 업무 특성상 민원인의 안전까지 고려해야 하기에 강경 대처가 쉽지 않다. 일선 경찰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기보다 조직 차원의 대응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경찰서에서 이런 일이?…폭언과 폭행, 심지어 노상방뇨까지
지난 7월 25일 오전 1시 50분쯤 술에 취한 중년 남성 A씨가 대리운전 기사의 손에 이끌려 대구동부경찰서 동대구지구대로 들어왔다. 대리운전 기사는 손님인 A씨가 자신을 불러놓고도 술에 취해 목적지를 얘기하지 않는다며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다. 답답하기는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A씨는 "내가 왜 여기 있느냐"며 경찰의 인적사항 확인을 완강히 거부했다.
A씨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1시간 동안 경찰관에 욕설을 쏟아부으며 지구대 문을 양발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급기야 경찰관이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지구대 앞에서 볼일을 보는 등 돌발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경찰은 A씨를 경범죄 처벌법에 따른 관공서주취소란 혐의로 체포한 후 형사 입건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동대구지구대 소속 한 경찰관은 "지구대 앞에서 노상방뇨하는 사람이 우리 국민 중 몇이나 있겠나. 그 순간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며 "그냥 가도 된다고 얘기해도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려 하고 같이 온 대리운전 기사와 경찰관에게 시비를 걸었다. 술 드신 분들은 어떤 돌발행동을 할지 모르기에 사전에 주저앉히거나 그저 신경을 쓰고 조심하는 방법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주취자 외에도 상식적이지 않은 민원을 제기하거나 자신이 주장하는 민원이 생각대로 처리되지 않는다고 행패를 부리는 사람도 많다. 진행 상황을 설명하거나 중재에 나서도 민원인이 고집을 꺾지 않아 곤란한 경우가 있다"며 "나중에 경찰관을 상대로 민원이나 형사 고소, 진정을 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직원들의 스트레스가 상당하다"고 토로했다.
올해 지역 지구대에서는 경찰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민원인도 있었다. 지난 4월 29일 오후 5시 10분쯤, 한 달에 2번씩 대구 강북경찰서 동천지구대를 방문해 소란을 피우던 상습주취자는 이날도 1시간 20분가량 고성을 질러댔다. 혼자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고 대화할 곳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경찰들은 수차례 귀가를 안내하고 밖으로 보냈으나 해결되지 않자, 민원인을 관공서주취소란으로 체포하고 과태료를 부과했다. 그러자 해당 민원인은 고지서를 거부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지팡이로 경찰의 왼쪽 팔 윗부분을 내려친 후 오른쪽 주먹으로 왼팔 아랫부분을 다시 한번 가격했다.
폭행 장면을 현장에서 목격한 동천지구대 소속 경찰관은 "동료가 신체적으로 피해를 입은 것은 크지 않지만, 민원인이 소란을 피우면 지구대 전체가 업무에 지장을 받는다"며 "제지 과정에서 서로 다칠 가능성이 있으니 최대한 대화를 통해 잘 해결하려고 노력하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결국 법을 따지고 대응에 나설 수밖에 없다. 그럴 때마다 너무나 안타깝다"고 전했다.
◆혹시라도 민원인 다치면 송사 휘말려…경찰 보호 방안은 '아직'
대구경찰청에 따르면 지역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한 위법행위는 매년 수백건씩 발생하고 있다. 공무집행방해와 공용물손상 등으로 입건된 건수는 2019년 587건, 2020년 565건, 2021년 478건, 지난해 552건, 올해 8월 기준 402건이다.
문제는 경찰들이 피해를 보더라도 제대로 대응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악성 민원으로 발생하는 피해를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민원인의 안전도 염두에 둬야 하기 때문이다. 제지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경찰관에게 책임의 소지가 생기면 민원인이 경찰을 상대로 진정이나 고소를 제기하기 할 수 있다.
지난 2021년 경찰대 치안정책연구소 학술지 치안정책연구에 실린 논문 '경찰공무원의 폭력피해 과정과 영향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심층인터뷰에 응한 경찰 11명은 악성민원에 강하게 대처하다 민원인이 다치면 송사에 휘말리게 되고, 공무집행방해죄를 사건 처리하게 되면 시간이 소요돼 업무 등에 지장을 받을 수 있다고 호소했다.
이런 상황에도 주취자 등 경찰을 악성민원으로부터 보호하는 대책 마련은 지지부진한 상태다. 지난 2021년 4월 행정안정위원회 소속 김용판 국민의힘 의원이 '주취자 범죄의 예방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발의해 정부·지자체 등 유관기관이 협업하는 등 내용을 담았으나, 2년이 넘도록 계류 중이다.
일각에서는 개인이 아닌 조직 차원에서 대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류준혁 대구가톨릭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온갖 민원인들이 찾아와 소란을 피워도 조직 차원에서 경찰 개인을 보호하지 못하는 실정"이라며 "조직 내 제도적인 보완이 필요하다. 변호사를 지원해 준다든가 면책 기준을 마련해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상호 대구대학교 경찰학부 교수 역시 경찰 조직이 악성민원을 해소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김 교수는 "조직은 나서지 않고 개인만 악성민원에 노출되는 구조다 보니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도 않고 오히려 갈등만 증폭되고 있다"며 "경찰 개인이 혼자 악성민원을 처리하기 보다는 전담대응팀을 두고 직원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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