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취재현장] 공공임대주택, 최후의 보루가 무너졌다

윤수진 사회부 기자

대구 달성군 유가읍의 한 공공임대주택 입주민 회의실 앞에서
대구 달성군 유가읍의 한 공공임대주택 입주민 회의실 앞에서 '내 집 마련'을 꿈꾸며 이곳에 입주한 임차인들이 정부의 대책 마련을 촉구하며 침묵 시위를 하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윤수진 기자
윤수진 기자

소중한 사람들과 즐겁게 보내야 할 명절에도 밤잠 못 이루는 사람들이 있었다. 추석 연휴 기간 취재진과 연락을 주고받던 두 아이의 엄마는 애들이 커가는데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호소했다. 신혼의 단꿈을 안고 8년 전 입주한 부부도 대출, 이자, 소송 같은 골치 아픈 단어들을 늘어놓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대구 달성군 공공임대주택 임차인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찾아온 건 지난 2020년 4월이었다. 이곳 민간 건설사가 퇴거 임차인들에게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사고를 낸 것이다. 이 건설사 임원들은 지난 5월 사기 혐의로 모두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정부 기금을 받아 지어진 공공임대주택에서 보증 사고가 발생했다는 충격 속에서도 임차인들을 보증보험만을 믿고 버텼다. 보증보험에 가입한 세대들은 2천만 원씩 돌려받을 수 있다는 공문을 주택도시보증공사(HUG)로부터 여러 차례 받았기 때문이다. 임차인들은 개인 대출로 건설사의 빚 6천여만 원을 갚고 아파트를 분양받았으며, 보증 사고 이후로도 3년 동안 가구당 150만 원씩 내가며 HUG 보증보험을 갱신했다.

하지만 민간 건설사와 맺은 '감액약정계약'이 발목을 잡았다. 건설사는 막 입주한 임차인들을 상대로 계약 조건을 변경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따라 보증금은 3천만 원 오르고 월세는 20만 원가량 저렴해졌다. 건설사는 이 꼼수 계약으로 가구당 3천만 원에 달하는 현금을 쓸어 담았다.

이후 발생한 피해는 모두 임차인들의 몫이었다. 지난해 8월 임차인들이 HUG에 제기한 보증금 반환 소송에서 1심 재판부는 건설사와 임차인들이 맺은 감액약정계약 보증금은 보증보험 보장 대상이 아니라고 밝혔다. 보증보험에 가입하고도 돈을 돌려받을 수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그럼에도 HUG는 재판 직후 1심 결과와 무관하게 보증금 전액을 보장하겠다고 임차인들에게 약속했다. 대신 임차인들이 항소하지 않는 조건이었다. 실제로 61가구가 판결 이후 HUG로부터 보증보험금 11억 원을 받아 갔고, 임차인들이 항소를 포기하면서 재판 결과는 확정됐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 건 지난 6월이었다. 전체 908가구 중 269가구가 보증 이행을 신청하자 HUG가 돌연 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다며 1년 만에 태도를 바꿨기 때문이다. HUG가 근거로 든 것은 임차인들의 항소 포기로 결정된 1심 판결이었다. 지난해 보증금 지급은 단순히 직원의 실수였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미 돈을 받아 간 61가구도 보증금을 뱉어내야 할 처지다. 지난달 27일, HUG는 앞서 보증 이행했던 임차인들에게 환급이행금 반환 청구서를 보냈다. 잘못 지급한 보증금을 기간 내에 반환해 달라는 것이다.

결국 '공공'임대주택 보증 사고로 상처 입은 임차인들의 가슴에 '공공'기관인 HUG가 다시 소금을 뿌린 꼴이 됐다. 공공기관으로서 누구보다 규정에 따라 정확히 업무를 처리해야 했음에도 불필요한 말 바꾸기로 임차인들에게 막대한 손해와 혼란을 초래했다.

임차인들이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던 최후의 보루는 이미 무너졌다. 그것은 그들이 돌려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보증금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공공을 향한 신뢰였다. 공공이 실수라며 한발 물러난 뒤, 남은 책임은 그들을 믿었던 서민들에게로 돌아갔다. 이 책임은 누구의 몫인가. 관련 있는 모든 '공공'이 이 질문에 응답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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