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공 치는 친구에게

김동혁 소설가

김동혁 소설가
김동혁 소설가

창식아, 무거운 마음으로 이 메시지를 보낸다.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벌써 30년이 넘었으니 이말 저말 빙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너 이제 골프 안 끊으면 나 너 안 볼 작정이다. 친구 사이라고 무조건 이해만 해 줄 수는 없는 것이니 말이다. 언젠가 네가 말했잖아. 너 같은 소설가 친구가 있어서 정말 자랑스럽다고. 그러니 창식아, 나를 봐서라도 제발 네 상황과 주제를 좀 파악해 주면 안 되겠니? 어릴 적, 친구들 중에 제일 공부도 잘하고 눈치도 재바르던 네가 마흔이 훌쩍 넘어 왜 이 모양이 된 것인지 나로서는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물론 너는 내가 골프를 치지 않으니 모르는 세계라고 되받아치겠지만 골프 때문에 지금 네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잘 좀 생각했으면 좋겠다.

창식아, 네가 3년 전 코로나 때문에 그럭저럭 버텨오던 한정식집을 말아먹고 재석이의 스크린 골프장에서 허드렛일을 돕는다고 했을 때, 우리 친구들 모두는 네가 멋지게 재기할 거라고 마음속으로 응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채 열흘도 지나지 않아 재석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러더라. 창식이 저 녀석 여기에 일을 하러 온 건지 골프 연습을 하러 온 건지 모르겠어. 눈치 보인다며 집에도 안 들어가고 밤새 공만 치고 있다니까. 어제 새벽엔 앞뒤 사정 모르는 제수씨가 전화 와서 아무리 친구 사이라도 퇴근 좀 시키라고 대뜸 소리를 지르더라.

당시 겨우 '백돌이'에 불과했던 네가 재석이 가게에서 쫓겨나기까지, 그 3개월 여의 짧은 시간 만에 3언더파를 기록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친구들은 '와아'하고 감탄을 쏟아냈지만 나는 그때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었다. 너도 이미 느끼고 있겠지만 이제 친구들이 네 연락 다 피하고 있다. 심지어 몇몇 친구들은 가까운 미래가 너처럼 될까봐 골프를 끊어야겠다고 말하는 녀석들까지 있단 말이다. 제수씨가 갈빗집에서 하루 종일 불판 갈고 서빙해서 번 돈으로 빠듯하게 살림이 돌아가는 걸 알고 있는 네가 현금서비스 받은 돈으로 어찌 내기 골프까지 치러 다니는지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눈치도 없이 자리에 앉으면 골프 이야기만 해대는 통에 네가 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자리를 피하려는 친구들도 많다는 거 너는 아직 눈치 못 챘니? 저번 매운탕집 모임에서 골프 '썰'을 풀어놓던 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커다란 국자를 들고 스윙 시범을 보이던 모습, 정말 엽기적이었다. 그리고 저런 인간이 내 친구라는 것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창식아, 얼마 전 네가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었지. 골프는 너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마지막 보루라고. 물론 그날은 너의 표정이 너무도 아련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자존감이란 건 억지로 지킨다고 네 옆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자존(自尊)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단다. 하나는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높인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잘난 체한다'는 거다. 넌 대체 어떤 자존감을 지키고 있는 거냐. 요즘 그 '금쪽 같은 박사'가 자주 하는 말이 있지? 아이의 자존감이 높아야 공부도 잘하고 어쩌고 하는 소리. 웃기는 말이다. 열심히 노력해서 공부를 잘해야 자존감이 높아지는 거지 어떻게 자존감이 높다고 공부를 잘할 수 있겠니?

창식아, 나는 골프 안 쳐서 잘은 모르지만 골프는 그 자체로 품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골프를 치는 사람들이 품위가 있으니 골프의 품격도 만들어지는 것 아니겠니? 부디 너에게서 품격 있는 소식이 들려오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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