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개인도, 정부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정부가 잘못된 화폐제도를 시행하여 경제구조가 붕괴하면 나라가 제풀에 주저앉아 망한다. 그 전형적인 사례가 조선(대한제국)이다.
조선왕조는 초기에 지폐인 저화(楮貨)와 조선통보(朝鮮通寶)라는 동전을 발행했다. 저화는 가치가 계속 폭락하여 1423년(세종 5) 유통이 중단되었고, 조선통보는 동전 원료인 구리(銅) 부족으로 주전량이 너무 적어 실패했다. 이후 일상 거래는 미곡, 포목 등 상품을 통해 이루어졌다.
전국 단위로 통용되는 화폐인 상평통보가 등장한 것은 숙종 시절인 1678년이다. 이 무렵 상평통보를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일본으로부터 동전 원료인 구리를 4,000톤 이상 수입했기 때문이다.
조선 조정은 상평통보 발행을 독점하여 화폐 주조에 따르는 수익, 즉 시뇨리지(seigniorage)로 10~50%를 얻었다(원유한, 『조선 후기 화폐사연구』, 한국연구원, 1975, 110쪽). 화폐 발행으로 얻는 이익은 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의 구휼자금이나 군사비 등 국가 운용에 필요한 공적인 분야에 건전하게 사용되었다.
조선왕조는 1678년부터 1867년까지 189년간 약 1,582만 냥의 상평통보를 발행했다(이헌창, 「1678-1865년간 화폐량과 화폐가치의 추이」, 『경제사학』27, 3~45쪽). 동전 원료인 구리 가격이 상승하자 조정은 동전 제조에 들어가는 구리량을 계속 줄였다. 그 결과 동전 1개의 무게는 9.4그램에서 1752년 6.8그램, 1800년 4.5그램으로 줄었다(원유한, 앞의 책, 110~111쪽).
조선 조정은 상평통보의 실질 가치를 지속적으로 떨어뜨리는 가치 변조를 통해 화폐주조 차익을 독점했다. 19세기 후반, 상평통보의 가치를 더는 떨어뜨리는 것이 불가능하자 이번에는 당백전을 발행한다.
대원군은 1866년 12월부터 1867년 6월까지 6개월 동안 경복궁 중건 등에 필요한 재원 마련을 위해 무려 1,600만 냥의 당백전을 발행했다. 그전까지 189년 동안 정부가 발행한 상평통보 공급량과 동일한 액수를 6개월 만에 폭포수처럼 쏟아낸 것이다.
◆당백전·청전·당오전 발행의 비극
당백전의 명목 가치는 상평통보의 100배였으나, 실질 가치는 상평통보의 5~6배. 상상을 초월하는 악화(惡貨)였다. 그 결과 2년 동안 쌀값이 무려 600%나 치솟는 등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시뇨리지는 무려 360%였다(원유한, 『한국화폐사: 고대부터 대한제국 시대까지』, 한국은행, 2006, 190쪽). 이를 근거로 계산하면 당백전 주조로 조정이 얻은 시뇨리지는 1,100만~1,200만 냥으로 추정된다. 대원군은 이 엄청난 주전수익을 왕실 권위 회복을 위한답시고 경복궁 중건에 투입했다. 관료들은 경복궁 중건은 나라 경제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거듭 경고했으나, 대원군은 이를 강행하여 기울어가던 나라에 치명상을 입혔다.
악화의 표본인 당백전의 대량 공급으로 온갖 모순이 폭발하자 국왕은 6개월 만에 주조를 중단하여 시중에서 퇴장당했다. 이후 조정은 중국의 오래된 화폐인 청전(淸錢)을 폐철로 수입한 다음 법정 화폐로 유통했다. 청전은 조선에서 유통되는 화폐의 30~40%를 차지했다.
1874년 고종은 아버지 대원군을 내쫓고 친정을 선언하면서 느닷없이 청전 유통을 금지했다. 사전 준비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총유통량의 30~40%를 차지하던 청전이 시중에서 퇴출당하자 급격한 통화량 감소에 따른 심각한 부작용이 만연했다.
1883년 고종은 당오전을 주조하여 유통했다. 당오전의 실질 가치는 상평통보와 같았으나 명목 가치는 5배로 뻥튀기한 발행한 악화였다. 게다가 품질이 조악해 위조 동전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당오전 발행 여파로 10년간 생필품 가격이 100배 이상 급등하자 결국 1891년 고종은 당오전 주조를 중단했다.
1892년부터는 신식화폐조례를 제정하여 백동화를 발행했다. 백동화 한 개의 실질 가치는 5푼 미만이었지만, 액면 가치는 그 다섯 배인 2전 5푼으로 부풀렸다. 주전 차익은 왕실이 가져갔다. 1892년부터 1904년까지 1,674만 원의 백동화를 발행했는데, 1896년 정부 세입 중 26.6%가 백동화 발행으로 얻은 것이다.
백동화의 주전 차익이 워낙 크자 너도나도 백동화 위조 사업에 뛰어들었다. 동전 위조 대열에 일본인, 영국인, 독일인, 중국인도 가담했다. 일본인들은 오사카에서 백동화를 대량으로 위조한 다음 몰래 조선에 들여와 유통시켰다. 그 결과 1905년 위조된 백동화 액수가 1,000만 원이나 되었다. 결국, 백동화도 1901년 제조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악화로 인한 경제 붕괴가 망국의 원인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대한제국 정부는 1904년 만신창이가 된 재정과 화폐 금융 관련 업무를 일본인 재정 고문 메가타 쇼타로(目賀田種太郞)에게 위임했다. 메가타의 건의에 따라 대한제국 정부는 1904년 11월 조폐 업무를 일본의 오사카 조폐국에 넘겼다. 1905년 6월 8일 일본은행이 발행한 일본은행권과, 이를 기초로 한 제일은행권을 대한제국의 본위화폐로 사용하는 훈령이 발표되었다. 일본의 제일은행권이 대한제국의 법화(法貨)가 됨으로써 화폐 주권이 일본에 넘어갔다.
조선 정부는 1867년 이후 40여 년 동안 당백전·청전·당오전·백동화 등 네 종류의 악화를 발행·유통시켰다. 화폐 발행으로 얻은 막대한 주전 수익은 국왕과 왕실, 정부가 가져갔다. 그 결과 상상을 초월하는 인플레가 발생하여 조선은 회복 불능의 경제 위기에 빠졌다.
조정과 왕실이 가져간 주전 수익은 정부가 민간으로부터 무상으로 자원을 수탈했음을 의미한다. 민간이 시뇨리지에 해당하는 만큼의 화폐 주조세를 부담했으니, 그것은 일종의 세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조선 백성이 찢어지게 가난했던 원인 중의 하나였다.
화폐 발행으로 인한 극심한 물가상승, 그 결과물인 경제 위기가 도래하지 않았다면 일본의 한국 지배가 그토록 손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일본의 지배 이전에 조선왕조는 악화 발행으로 인한 경제 악화, 화폐 발행 독점에 따른 위기가 중첩되면서 스스로 붕괴했다. 이것이 숨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김용삼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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