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의 비비하눔 모스크. 일찍부터 중앙아시아 이슬람 세계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해 온 모스크이다. 거대한 아치 형태의 입구가 방문자들을 맞이한다. 외부 장식은 켈리그라피, 기하학적 문양들로 가득 장식되어 있다. 내부에는 화려했던 벽화 장식이 부분적으로 남아있다.
비비하눔 모스크의 또 하나 볼거리는 중앙광장에 있는 대형석조 쿠란(코란이라고도 함) 받침대이다. 원래 이곳에는 현존하는 쿠란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 쿠란이 놓여 있었다. 그 쿠란은 러시아 침공으로 인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반출되었다가, 1924년 다시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수도 타슈켄트의 이맘광장 모스크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거대한 대리석 받침대는 티무르가 오늘날의 이라크지역을 침공했을 때 가져온 석재이다. 이 구조물은 영험한 능력이 있다고 전해져, 소원을 말하며 세 바퀴를 돌면 이루어진다고 한다. 또는 아기를 원하는 여성이 일곱 바퀴를 돌고 아랫부분 아홉 개의 다리 사이를 기어서 지나가면 이루어진다고도 한다.
◆영험한 능력을 가졌다는 받침대
비비하눔 모스크는 구시가지에서도 보인다. 골목길을 걸으며 푸른 모스크의 지붕 만 보고도 찾아갈 수 있다. 유적지 부근이므로 개발할 수 없어서인지 주거환경은 낙후돼 있다. 화려한 이슬람 사원 건물과는 대조적으로 서민들의 삶은 윤택하지 않은 것 같다. 비비하눔 사원 입구에 도착하면 곧바로 600년 된 시장인 시압 바자르와 만난다.
예로부터 거대한 사원으로 순례객들이 몰려들었고 자연스럽게 시장은 형성됐을 것이다. 고대 실크로드 무역의 중심지였던 사마르칸트에서 바자르의 역할은 도시의 역사와 뗄 수 없는 장소이다. 지금은 과거와 같이 다양한 문물이 거래되지는 않지만,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어 사마르칸트를 방문하는 여행객들이 반드시 찾는 장소이다.
1399년 인도 원정에서 돌아온 지배자 티무르는 세계에서 비교할 수 없는 장대한 모스크를 건설할 결의를 한다. 당시 조선에서는 태조 이성계에 이어 이방원이 3대 국왕 태종으로 등극하는 혼란의 시기였다. 비비하눔 모스크 건설에는 그가 점령한 각국으로부터 불러들인 2백여 명의 저명한 예술가, 건축가들과 6백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동원됐다.
그들이 전한 지식과 기술이 융합되었기 때문에 사마르칸트는 문명 또는 문화 교차로라고도 불린다. 자재와 돌을 운반하는데 95마리의 코끼리도 동원됐다. 티무르 자신이 매일 현장에 출두하여 독려했다. 그 당시의 모습은 스페인 외교관 루이 곤잘레즈의 '중앙아시아 여행기'에도 기록으로 남아있다.
티무르는 건설현장 높은 곳에 큰 바구니를 달아두고 고기와 주화를 가득 넣어 두고 경쟁을 시키면서 공사 진행을 재촉했다고 한다. 그 결과로 모스크는 티무르가 죽기 1년 전인 1404년 이례적으로 빠르게 완성됐다. 티무르의 욕심에 의한 돌관공사의 폐해는 나중에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사원이 완공된 후 어느 날, 기도 중이던 신자의 머리 위로 벽돌이 떨어졌다. 사고는 계속되었고 이를 두려워한 신자들도 찾지 않았다. 그 후에도 붕괴는 계속되었으며 서서히 폐허로 변해갔다. 1897년 지진이 덮쳐 더 심하게 무너져 내렸다. 주된 붕괴의 원인은 건설을 너무 앞당긴 것, 그리고 크기가 너무 거대한 구조 때문이었다고 분석되고 있다.
그것은 흡사 뒤이어 따라올 티무르제국의 운명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2001년이 되어서야 사마르칸트가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이 되면서 재단의 협력으로 대규모 복원작업이 진행됐다.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서서히 되찾고 있으나 아직도 내부에는 부분적으로 상처가 남아있다.
◆우아하고 지혜로운 여인
건설된 지 6백 년이 넘는 동안 폐허처럼 되어있던 모스크에는 여러 가지 전설도 덧칠해져 생겨났다. 거대하고 오래된 건축물은 늘 그렇듯 다양한 이야기들을 남긴다. 전설이 만들어진 배경에는 슬픈 러브스토리가 담겨있다. 모스크의 이름인 '비비하눔'은 '우아하고 지혜로운 여인'이란 의미를 품고 있다. 왕비 비비하눔은 티무르가 인도 원정에서 이겨서 돌아올 것을 예상했다.
그 공적에 필적하는 모스크를 지어 사랑하는 남편에게 선물하기로 했다. 당대 최고의 기술자들을 모아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던 어느 날, 왕비를 걷잡을 수 없이 흠모해 오던 젊은 건축가가 왕비에게 단 한 번의 입맞춤을 요구했다. "더 이상 건축을 진행할 수 없습니다. 저의 원을 풀어 주십시요"라고 애원했다. 총책임자인 그는 왕비가 만약 허락하지 않는다면 일을 계속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왕비의 마음은 크게 흔들렸다. 티무르를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당대 최고 미남건축가로 부터의 구애였다. 고심 끝에 다음날 왕비는 몇 개의 계란에 색을 입혀 보여주며 색상은 다르나 껍질을 벗기고 보면 속은 어느 것도 다 같다. 여기 있는 아름다운 시녀들 중, 어느 누구라도 선택하시고 나는 포기해주길 바란다며 설득했다.
그러나 건축가는 두 개의 컵을 가져와 "지혜로운 왕비시여, '어느 쪽도 같아 보이나 한쪽은 냉수이고 또 하나는 꿀물이 들어있다며 되돌렸다. 왕비는 할 수 없이 볼에만 허락했지만 그 키스는 너무나 강렬하고 뜨거워서 흔적이 남아 버렸다. 이렇게 해서 모스크는 완성됐다. 사마르칸트로 돌아온 티무르는 이 모스크의 완성에 놀라 사랑하는 왕비에게 한시라도 빨리 감사함을 표하려 했다.
그런데 그녀를 만나보니 볼에 키스 자욱이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 자초지종을 알게 된 그는 격노했다. 건축가는 사형, 왕비는 그녀가 만든 선물인 미나렛(첨탑)위에서 아래로 던져 졌다. 여행가이드에게 들은 말로는 그때 건축가는 페르시아 카펫을 타고 날아갔다고도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 처형만은 면하게 된 왕비는 티무르의 명령에 따라 얼굴을 검은 베일로 가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그 아름다운 용모는 두 번 다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왕비를 위한 비비하눔 영묘
비비하눔 모스크를 필자가 방문했을 때는 서서히 노을이 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좋은 사진이 나올 적절한 시간이었지만 거대한 건물 전경을 한 프레임 속에 담기는 광각렌즈로도 부족했다. 또 하나의 난제는 역광의 빛이 강해 건물 부분의 그늘이 너무 어둡게 보여 고심했었다.
이때 동행했던 한 사진가가 최신형 스마트폰으로 촬영해, 두 가지 문제를 모두 해결한 사진을 보여주었다. DSLR카메라를 무색하게 한 그 사진을 지면에 소개하기로 했다. 석양의 분위기를 살리면서도 아름다운 모스크의 화려한 색상들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비비하눔 모스크 맞은편에 작은 건물이 서 있다. 티무르의 왕비 비비하눔이 잠들어 있는 비비하눔 영묘이다. 거대한 모스크 앞에 있어서 아담한 규모의 영묘가 더욱 작아 보인다. 푸른색 돔과 밝은 상아색 건물의 조화는 깔끔함과 단정함이 느껴진다. 티무르의 왕비, 비비하눔의 본명은 '사라이 물크카눔'이었다.
그녀는 차가타이 칸의 후손으로 칭기즈칸의 피를 이었기에 이른바 황금씨족이었다. 원래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지배자 아미르 후세인과 결혼했지만, 티무르의 공격으로 생포되었다. 그녀를 왕비로 데려온 티무르는 자신이 원하던 혈통에 의한 통치의 명분도 얻었다. 전설에 따르면 운명의 키스에 분노해 왕비를 죽게 한 티무르는 곧 후회하고 그녀를 위해 영묘를 지은 것이 된다.
그곳 지하에는 비비하눔과 그녀의 친정어머니가 잠든 관이 놓여 있다. 사랑으로 지은 건물과 죽음으로 지은 건물이 마주 보는 곳에서 사랑과 인생사를 생각한다.
글·사진 박순국 (언론인) sijen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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