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말의 방식과 세대(世代)

김동혁 소설가

김동혁 소설가
김동혁 소설가

이야기는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전달의 방법에 따라 수용의 질이 크게 달라진다. 같은 이야기도 글로 읽을 때와 영상을 볼 때 느끼는 감동이나 공감의 크기가 다른 것처럼 말이다. 우리 주변의 예를 봐도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와 친구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는 듣는 이의 입장에서 큰 차이를 가진다. 왜 그런 현상이 발생할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선 우리는 이야기의 어떤 부분에서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일까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주 잘 만들어진 영화 한 편을 보고 극장을 나서며 우리는 보통 이렇게 말한다. "재미있다." 영화의 장르가 코믹이든 액션이든 호러든 멜로든 상관없이 우리는 잘 만들어진 영화에 '재미있다'라는 평가를 붙인다. 이러한 우리의 반응을 다시 설명하자면 재미의 기준은, '코믹이 가장 코믹다울 때', '액션이 가장 액션다울 때'와 같이 그 장르가 가진 일정한 특성을 모두 충족시킬 때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의 콘텐츠에서 주제의 역할은 매우 제한적이라는 논리가 만들어진다. 수많은 서사물의 기본적인 이야기성은 거의 흡사하다. 현대 사회에 이르러 디지털과 매체가 동시에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우리는 대부분의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다.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어딘가에서 한번쯤은 다루어졌음직한 이야기가 다른 제목으로 재생산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이야기에 열광하고 감동하는 것일까? 그것은 스토리텔링의 변용과 발전 때문이다. 할머니의 스토리텔링이 다르고 친구의 스토리텔링이 다르다. 할머니는 옛이야기에 어울리는 스토리텔링을 구사하고 친구는 우리 일상에 걸맞은 스토리텔링을 구사한다. 바로 그 점에서 같은 이야기도 수용의 차이가 생겨난다. 하나의 장르다움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그 장르다움을 인정하는 기준이 꽤나 까다로워진 것 같다. 특히 현실에서 말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하는 말을 못 알아듣겠다고 하고 아이들은 어른들의 이야기를 따분해서 들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물론 이런 현상은 비단 요즘만의 일이 아니다. 말에서 오는 세월의 괴리는 세대간의 '차이'를 늘 만들어왔다. 하지만 예전에는 어디까지나 '세대 차이'였지 이것이 하나의 '세대 분열'까지 이어졌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아주 극단적으로 맞서고 있는 것이다. '애들이 말하는 게 그렇지 뭐', 혹은 '어르신들은 원래 그렇게 말하는 거야', 라는 식으로 다른 세대가 구사하는 말의 방식을 인정해 주지 않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아마도 이념이나 지역, 성별의 분열처럼 고치기 힘든 우리 사회의 큰 상처가 또 하나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세대의 분열은 앞서 말한 이념이나 성별의 분열과는 다른 특징 하나가 있다. 한때는 나도 젊었었고, 언젠가는 나도 늙어버릴 것이라는 당연한 이치 말이다. 한쪽은 겪어봤으니 잘 알고 있고 다른 한쪽은 다가오고 있으니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조금만 노력하면 잘 봉합될 상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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