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장] 살사리꽃과 시체꽃

정정순 영남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정정순 영남대 사범대학 교수
정정순 영남대 사범대학 교수

주말에 근교에 나갔다가 때론 군락으로, 때론 드문드문 피어 있는 코스모스들을 보며 새삼 가을이라는 계절을 실감하게 된다.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 등하굣길에서 자주 마주쳤던, 여린 듯 청초한 느낌을 자아내어 까닭 모를 애상감과 향수를 곧잘 불러일으키곤 했던 가을 길동무 같은 꽃. 가녀린 꽃대와 꽃잎이 바람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 살살대는 모습에서 살사리꽃이라 불렸다고도 하는데 그 이름만으로 정감 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코스모스 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그리는 꽃의 모양과 닮았다. 대개 꽃을 그린다고 하면 먼저 가운데 원을 그리고 그 주변으로 여러 개의 꽃잎을 연달아 그려 넣는데, 이것이 국화과에 속한 꽃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코스모스 또한 국화과에 속한 꽃으로, 장미나 백합과는 다른 이러한 꽃 모양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중간의 원을 중심으로 여러 꽃잎이 둘러싸고 있는 이 흔한 꽃 모양의 진실을 알고 있는지. 코스모스의 꽃잎은 보통 8개인데 이 8개의 살살대는 꽃잎들이 실은 가짜 꽃이라는 것이다. 이 꽃잎들은 혀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따로 혀꽃(설상화)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럼 진짜 꽃은? 한가운데 원 안에 대롱, 즉 관 모양의 꽃이 빽빽하게 밀집해 있는데, 이것이 진짜 꽃이다. 실제로 꽃가루받이를 하여 씨앗을 만드는 일을 이 대롱꽃(관상화)이 한다. 혀꽃이 화려하면서도 다양한 색깔을 지니고 있는 까닭은 곤충의 시선을 끌기 위하여서이다. 진짜 꽃인 대롱꽃이 크기가 작고 볼품없어서 벌과 나비를 유인하기 어려워 가짜 꽃을 피운 것이 혀꽃이다. 그러니까 코스모스의 하늘거리는 꽃잎은 꽃의 위장인 셈이다. 물론 이러한 꽃의 진실을 안다는 것이 내가 코스모스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하등의 영향을 미치거나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최근 한 신문 기사에서 인상적으로 보았던 라플레시아라는 꽃을 함께 떠올리게 된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태국 등 동남아 정글에서 덩굴식물에 기생해 자란다는, 우리에게는 그 이름조차 생소한 라플레시아. 검색을 해 보면 붉은 바탕에 흰 점박이 무늬들을 지니고 있는 거대하면서도 강렬한 모습의 꽃 사진을 찾아볼 수 있다. 무엇보다 꽃의 크기가 최대 1m나 되고 꽃 무게 또한 약 11㎏에 달한다고 하니, 우리의 꽃에 관한 상식을 적잖이 벗어난다는 점에서 꽤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더 놀라운 것은 이 거대한 꽃의 향기다. 꽃향기 하면 우리는 달콤한 듯하면서도 잔잔하게 번지는 기분 좋은 향을 기대한다. 그런데 라플레시아라는 꽃은 동물 사체 썩는 냄새를 풍긴다고 한다. 실제로 1876년 영국에서 열린 박람회에 라플레시아를 보기 위해 몰려든 많은 사람들이 이 꽃의 냄새에 비명을 지르거나 구토를 하기까지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 특유의 악취로 시체꽃이라고도 불린다고 하는데 이 섬뜩한 이름을 붙인 까닭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사체 썩는 냄새를 풍기는 시체꽃이라니, 그걸 꽃이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 냄새의 본질은 저 코스모스의 혀꽃과 다르지 않다. 라플레시아 또한 꽃가루받이를 위해 곤충이 필요한데 이 곤충(파리)을 유혹하기 위해 그런 악취를 풍긴다는 것이다. 나비와 벌을 유인하기 위해 가짜 꽃을 화려하게 피우는 코스모스와, 파리를 유인하기 위해 악취를 풍기는 라플레시아. 살사리꽃과 시체꽃이라는 명명을 놓고 보면 한쪽이 억울할 법도 하다. 그러니 최근 어디선가 들은 이 말이 계속 맴돌 수밖에 없다. 자연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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