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5월 23일 대구 감삼정수장(옛 두류정수장) 부지에서 열린 강정상수도 건설 기공식. "하나 둘 셋 발파~~" 내빈들의 발파 버튼에 1만 여 시민들의 함성과 박수 소리가 두류산을 뒤흔들었습니다.
낙동강과 금호강 합수부에서 취수한 강물을 이곳까지 끌어와 수돗물로 정수하는 강정상수도 건설. 자유당 정권 시절인 1959년부터 계획됐지만 4·19혁명으로 연기, 5·16군사 쿠데타로 또 지연…. 이날 발파는 3정권 8대 시장이 씨름한 8년만의 대 역사로 '대(大)대구 건설'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1964년 가을부터 하늘이 마르더니 겨울이 가고 봄이 다 지나도록 비 구경을 못했습니다. 당시 수원지는 가창(가창댐)·산격(금호강 표면수)정수장, 동촌 보조수원지 등 3곳. 금호강은 매말라 백사장으로, 1959년 막은 가창댐 수위도 바닥으로 치달았습니다. 식수가 고갈되자 81만 대구 시민들은 '극악상태'에 빠졌습니다.
수압이 약한 산동네 수도꼭지는 마른지 오래. 3월 15일 현재 상수도에 의지하는 시민은 전체의 30%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산 아래까지 10리 길에 물지게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물 한 지게에 15원이나 받아먹는 악덕 우물 주인도 생겨났습니다. 밥 지을 물이 없어 빵을 먹고 등교하는 아이도 늘었습니다.
목마른 사람이 샘 판다고, 푸른다리(경부선 철교) 너머 산간 동네에선 공동 우물을 60m까지 파 내려갔습니다. 우물을 파던 인부가 흙더미에 묻히는 사고도 잇따랐습니다.
"물을 주든지 공장 안 우물을 메우든지 하라!" 참다 못한 신천 4구 4백 여 동민들은 한국나일론 공장(현 수성4가)에 몰려가 공장이 동네 우물을 다 말렸다며 데모까지 벌였습니다.(1965년 3월 16일자 매일신문)
그해 4월 중순, 가창댐도 믿을 수 없게 되자 하루 5시간이던 제한급수가 3시간으로, 급기야 수성못 물을 빼내 식수로 사용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번 가뭄은 1907년 서울에 통감부 기상대가 생긴 이래 가장 심한 가뭄…." 1965년 6월 13일자 매일신문은 이렇게 전했습니다.
목마른 세월이 흘러 1969년 1월 22일, 마침내 강정상수도가 준공돼 첫 통수를 봤습니다. 착공 2년 8개월 만입니다. 강정취수장-감삼(두류)정수장-대봉배수지까지 장장 16km. 1일 최고 생산 능력 13만 5천톤, 국내 최신식 시설로 고지대까지도 24시간 무제한 송수….
수돗물이 남아 최소 5년간 식수 걱정은 덜게 됐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물을 긷는 시민도 많았습니다. 수도관이 코앞으로 지나가는데도 시설자금(약 3만원)이 무서운 영세민들에 상수도는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상수도를 통수하던 날, 하늘에서 본 두류정수장 주변은 온통 논밭으로 아득합니다. 성서로 가는 외길(현 달구벌대로)에 자동차는 숨은 그림 찾기. 바늘 같은 전봇대만 하얗게 섰습니다. 50여 년 전 대구는 이랬습니다.
그때 기공식에 참석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대구가 너무 낙후됐다며 구원투수를 내려 보냈습니다. '대대구 건설' 특명을 받고 부임한 태종학 시장(재임 1966.5~1969.10)은 이튿날 새벽부터 현장을 찾았습니다. 강정상수도 건설, 3공단 조성, 동대구역 신설, 동대구로·달구벌대로 구상…. '불도저 시장'으로 통했던 그는 대구 지도를 새로 그렸습니다.
2023년 오늘, 드넓던 논밭은 빌딩 숲으로 논두렁 밭두렁 길은 '거미줄 도로'가 됐습니다. 대구 식수를 책임졌던 이곳 정수장 부지는 2008년을 끝으로 그 명을 다했나 싶더니 더 큰 숙제를 떠안았습니다.
"2025년 5월 착공, 2030년 상반기 완공". 이곳에 둥지 틀 대구시 신청사는 대한민국 3대 도시 위상을 되찾을 심장부로, 대구의 랜드마크를 꿈꾸고 있습니다. 신청사 건립이 제2의 대대구를 건설하는 신호탄이 되길 소망합니다.
댓글 많은 뉴스
윤석열 '탄핵소추안' 초안 공개…조국 "尹 정권 조기 종식"
尹 회견때 무슨 사과인지 묻는 기자에 대통령실 "무례하다"
"고의로 카드뮴 유출" 혐의 영풍 석포제련소 전현직 임직원 1심 무죄
유승민 "이재명 유죄, 국민이 尹 부부는 떳떳하냐 묻는다…정신 차려라"
대구 수성못 명물 오리배 사라졌다…농어촌공사, 세금부담에 운영 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