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에 한사군은 유주(幽州)에 속했다고 말했다
'세종실록' 지리지 평양부 조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평양은 본래 삼조선의 옛 도읍이다. 당요唐堯 무진년에 신인神人이 밝달나무 아래에 내려오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워 임금으로 삼아 평양에 도읍하고 이름을 단군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다. 주周나라 무왕이 상나라를 이기고 기자箕子를 이 땅에 봉하였으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다.
기자의 41대손 기준箕準의 시대에 이르러 연燕나라 위만衛滿이 망명하여 무리 천여 명을 모아 기준의 땅을 빼앗아 왕험성王險城(원주: 곧 평양부이다)에 도읍하였으니 이것이 위만조선이다.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가 한나라의 조명詔命을 잘 받들지 않자 한무제가 원봉 2년에 장수를 보내 공격하여 진번, 임둔, 낙랑, 현도 4군으로 정해서 유주幽州에 예속시켰다.(漢武帝元封二年 遣將討之 定爲眞蕃臨屯樂浪玄菟四郡 隷于幽州)"
'세종실록' 지리지는 평양을 삼조선의 옛 도읍지로 규정한 다음 서한의 무제가 이를 공격하여 한사군을 설치하고 유주幽州에 예속시켰다고 말했다.
'전한서前漢書' 지리지에서도 진시황 때 설치한 요서군, 요동군과 한무제때 설치한 현도군, 낙랑군이 모두 유주에 속했다고 하였다. '전한서'에 진번군과 임둔군은 보이지 않는데 이는 뒤에 낙랑군, 현도군에 통폐합되었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에서 평양은 본래 단군, 기자, 위만 삼조선의 옛 도읍지인데 한무제가 평양성을 공격하여 한사군을 설치하고 유주에 소속시켰다고 했고 '전한서'에서도 또한 요서군, 요동군, 현도군, 낙랑군은 모두 유주에 속한 지역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유주가 어딘지 그것만 확인된다면 고조선의 위치는 저절로 밝혀지게 되는 것이다.
◆고대의 유주는 오늘날의 북경 지역이다
유주는 중국 고대의 행정구역 명칭이다. 시대에 따라서 관할 범위는 다소 변동이 있었지만 유주의 핵심구역은 언제나 지금의 북경시 서남쪽 광안문廣安門 일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모택동의 대형 사진이 걸려 있는 천안문 광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으로서 요나라의 남경성南京城과 금나라의 도성인 중도성中都城이 이곳에 있었다.
유주를 최초로 설치한 분은 순임금이다. '무경총요武經總要'에 "순이 유주를 설치했다.(舜置幽州)"라고 하였다.
서한시대에는 한무제가 원봉 5년(서기전 106) 전국을 기주冀州, 연주兗州, 청주靑州, 서주徐州, 양주揚州, 형주荊州, 예주豫州, 양주涼州, 익주益州, 유주幽州, 병주幷州, 삭방朔方, 교지交趾 13주로 나누고 여기에 중앙에서 자사刺史를 파견했다.
드넓은 중국에서 유주가 설치된 지역은 어디인가. '주례'에 "동북방을 유주라 한다(東北曰幽州)"라고 하였다.
'이아석지爾雅釋地'에서는 유주의 위치를 좀 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연燕나라를 유주라 한다. 곽박의 주석에는 역수易水에서 북적까지라고 하였다.(燕曰幽州 郭璞注 自易水至北狄)"
전국시대 7국 중의 하나인 연燕나라가 있던 지역이 유주인 데 곽박의 주석에 따르면 하북성 남쪽의 역수易水로부터 북방의 북적이 있는 지역까지가 유주라는 것이다.
역수는 하북성 서남쪽에 있는 강 이름으로 역현易縣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거마하拒馬河에 유입된다. 형가荊軻가 진시황을 암살하기 위해 떠날 때 연나라 태자 단丹이 이곳에서 전별하였다. 북적은 만리장성 밖의 흉노족을 지칭한 것이다.
그러면 연나라 땅은 왜 하북성 남쪽의 역수로부터 하북성 북쪽의 북적까지였는가. 하북성 동쪽에는 조선과 요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국책戰國策' 연책燕策과 '사기史記' 소진열전蘇秦列傳의 "연나라 동쪽에 조선, 요동이 있다(燕東有朝鮮遼東)"라는 기록이 잘 설명해준다.
그런데 동북공정은 이런 기록들을 다 무시한 채 진시황의 만리장성을 고무줄 늘이듯이 늘여서 북한지역까지 끌어다 놓는가 하면 발해만의 북경에 있던 유주를 한반도의 대동강 유역까지 확대시키기도 한다.
춘추시대의 오나라와 월나라는 강대국이었다. 그러나 오나라는 오늘날의 강소성, 월나라는 오늘날의 절강성에 있었다. 유주의 핵심구역은 언제나 지금 북경시 서남쪽 광안문 일대에서 벗어나지 않았는데, 유주가 만일 지금의 하북성, 요녕성, 길림성은 물론 북한의 평양까지 모두 포괄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방의 한 행정구역인 유주의 관할지역이 오나라 월나라를 합친 것보다도 몇 배나 더 컸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것이 과연 합당한 논리인가.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며 억지 이론을 늘어놓는 것이 동북공정인데 거기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 닫고 있는 것이 한심한 한국의 반도사학이다.
◆발해만의 하북성 노룡현 일대가 고조선의 평양이다
유주는 고대에 지금 하북성의 북경 일대를 가리키던 지명이다. '세종실록'의 기록대로 삼조선의 수도 평양이 유주에 있었고 '전한서'에서 말한 것처럼 낙랑군, 현도군이 유주에 속했다면 고조선의 수도 평양은 북한의 평양이 아닌 하북성의 발해유역에 있었다는 것은 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
그러면 단군이 건국한 고조선의 도읍지 평양은 과연 발해유역의 어디쯤 있었는가. 전 중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천혜의 땅인 발해만 유역, 즉 북경 동쪽 하북성 진황도시 북대하, 노룡현 일대가 고조선의 평양이었다고 본다.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이 고조선의 평양인 이유는 다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문헌적으로 이곳은 고조선의 건국을 뒷받침하는 여러 기록이 존재한다. 예컨대 '무경총요'에 나오는 북경 북쪽의 조선하, '태평환우기'에 보이는 노룡현의 조선성, '두로공신도비문'에 나오는 "고조선이 고죽국 지역에서 건국하였다(朝鮮建國 孤竹爲君)"라는 내용 등이 그것이다.
둘째는 하북성 노룡현 일대는 명칭적으로 역사상에서 평양의 평平 자를 계속해서 사용해 왔다. 고조선 시대의 평양平壤, 춘추전국, 진, 한시대의 우북평右北平, 삼국시대의 평주平州, 수나라 때의 북평北平, 당나라, 요나라, 금나라 시대의 평주平州, 원나라 때의 영평로永平路, 명, 청시대의 영평부永平府 등이 그것이다.
셋째는 북대하 부근의 노룡현은 지형적으로 평평한 들판으로 이루어진 평야지대이다. 이곳을 한 번쯤 방문해본 사람이라면 끝없이 펼쳐진 드넓은 들판이 과연 여기가 평양임을 실감케 된다. 현재는 중국의 유명한 포도 산지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노룡현은 평야지대로 되어 있지만 노룡현을 둘러싼 주변 지형을 살펴보면 남쪽에는 발해, 북쪽에는 연산, 서남쪽에는 갈석산과 요수가 있어 천연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고 노룡현 가까이에는 노룡새, 조선하, 밝달강, 밝달산 등이 있어 보호막을 형성하고 있다.
노룡현이 삼조선의 수도 평양으로서 무려 2,000년 동안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그 지역이 지닌 천연의 요새로서의 지형적 특성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불행히도 조선하, 조선성이 있던 노룡현 일대가 지금은 중국 영토로 되어 있어, 문헌적으로는 이곳이 고조선의 평양임을 입증할 수 있지만, 고고학적으로 이를 증명할 유물유적을 발굴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문헌 기록에 근거해 하북성 노룡현을 단군조선의 평양으로 보는 것은, 필자가 최초로 제시하는 주장이다. 한국의 반도사학은 고고학적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반대할 것이 뻔하다. 그러나 언젠가는 문헌 기록을 뒷받침할 지하의 유물들이 얼굴을 드러낼 날이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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