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학 속 호모에스테티쿠스] <21>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세속미(世俗美)에 대한 신적 사랑

이경규 계명대 교수

위대한 개츠비의 저자 피츠 재럴드. 네이버 캡처
위대한 개츠비의 저자 피츠 재럴드. 네이버 캡처
이경규 계명대 교수
이경규 계명대 교수

'위대한 개츠비'를 위대한 소설로 인정하더라도 주인공 개츠비가 왜 위대한지 입증하기는 쉽지 않다. 데이지에 대한 개츠비의 사랑이 지고지순하고 절대적인 경지라 해도 그걸 추진하는 수단이 너무 세속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빼앗긴 첫사랑을 되찾기 위해 엄청난 돈과 재물을 탕진한다. 그것도 밀주업과 같은 불의한 방법으로 번 돈이다. 더욱이 사랑의 대상인 여자가 세속에 물든 속물의 전형이다. 지고한 사랑을 받을 가치나 있는지 의문이다.

사실 제목 외에 소설 어디에도 개츠비를 '위대하다 great'고 수식한 데는 없다. 작가 자신도 제목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출판사의 전략에 따라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그간 많은 사람들이 개츠비의 위대성을 입증하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성공적인 논리는 본 적이 없다. 개츠비의 위대함을 굳이 논해야 한다면 아래 단락에 그 열쇠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체로 간과하는 부분이다. 압축과 비약이 심해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는 이유도 있다.

제이 개츠비는 자신의 '플라톤적 콘셉트'(Platonic conception)에 따라 창출된 인물이다. 그는 신의 아들(son of God)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사업, 즉 '거대하고 세속적이고 표피적인 아름다움'(a vast, vulgar, and meretricious beauty)의 서비스업에 종사해야 한다.

제6장에 나오는 화자 닉(Nick)의 진술이다. 대체 플라톤·신의 아들·미의 서비스,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개츠비는 17세 때 이름을 '제임스 개츠'에서 제이 개츠비로 개명하고 완벽히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한다. 스스로 자신의 이상을 설정하고 그것을 구축해 나간다. 그야말로 플라톤적 이상론(Idea)을 구현한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신의 아들, 즉 예수라면 모르겠다. 원수도 사랑하고 죄인도 사랑하되 죽기까지 그리한다는 것은 예수 이전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예수의 아버지 여호와도 그렇지 않았다. 구약의 하나님은 못하면 벌하고 잘하면 아름다운 것으로 보상하는 권선징악의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한 아버지의 현실 논리와 가치를 아들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아버지의 '거대하고 야하고 피상적인 아름다움'(a vast, vulgar, and meretricious beauty)의 세속 사업을 이어간다. 게츠비는 밤마다 파티를 열어 최고의 세속미를 제공한다. 자신이 선택한 세속 여자는 목숨을 바쳐 신적으로 사랑한다.

이렇게 아들 개츠비는 아버지의 비즈니스를 수용하면서도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여 끝까지 밀고나간다. 그것은 절대적인 사랑이요 목숨을 바치는 사랑이다. 물욕에 찌든 배신자(데이지)여도 상관없다. 사랑할만한 자를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구약에선 하나님도 그랬다. 마땅히 돌아서거나 응징해야 할 상대를 죽도록 사랑한다면 그것은 예수 같은 위대함이 아니고는 가능하지 않다.

문학적으로 보면 개츠비의 위대함은 지극히 세속적인 미를 신적인 순수함으로 사랑하는 역설에 있다. 물론 계속될 수 있는 역설은 아니다. 파국은 예정된 수순이고 마지막엔 숭고한 비극이 펼쳐진다. 영화를 보면 총에 맞은 개츠비가 풀장에 사지를 뻗고 부유한다. 십자가의 수상(水上) 버전이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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