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취재현장] 이유 있는 사표

강은경 서울취재본부 기자
강은경 서울취재본부 기자

"제가 지금 당장 선거판에 뛰어들겠다는 건 아닙니다만…."

지난 21대 총선이 몇 개월 남지 않았을 시점 출마설이 무성하던 정부 부처의 한 고위 공무원은 일신상의 이유로 사표를 제출했다. 얼마 뒤 예상대로 그는 자신의 고향인 대구경북(TK)의 한 지역구에 총선 출마를 선언했고, 결과적으로는 부단히 애를 썼음에도 여의도 입성은 허락받지 못했다.

같은 시기 출마설이 나돌던 또 다른 고위 공무원은 대외적으로 "공직자 신분이라 출마를 논하는 게 적절치 않을 것 같다"는 입장을 표해 왔으나, 사석에서 "혹시 나가시느냐, 왜 나가려 하시느냐"고 물으면 지역 경제와 혁신에 대한 비전을 진지하게 내놨고 같이 듣던 이들도 고개를 점점 끄덕였다. 그는 철학도 있고 지역에 대한 애정도 강한 관료였으나 고심 끝에 출마의 꿈을 접었다.

내년 4월 치러지는 22대 총선을 앞두고 공직사회에 또다시 정치 바람이 들고 있다. 그동안 선거에서 관료 출신에 다소 후한 점수를 줬던 지역 정서가 있는 데다, 보수당 공천이 곧 당선과 직결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어느 때보다 TK 출신 고위 공직자들이 주목받는 분위기다.

공직에서는 최고의 정점을 찍은 그들일지 몰라도 금배지를 달기까지 넘어야 할 산은 만만찮다. 고시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공천장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같은 고시 출신끼리는 보이지 않는 물밑 경쟁을 치열하게 해야 한다.

특히 정무직 고위공직자들은 이러한 정치 바람을 정면에서 맞고 있는 모양새다. 정무직 고위공직자는 대통령실 또는 집권 여당의 부름에 응답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어서다.

이들은 TK 현역 국회의원들에게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존재다. 현역 의원들은 최측근을 통해 출마설이 나도는 고위공직자의 출마 의향을 떠보거나, 마음이 급한 의원들은 당사자에게 대놓고 물어보기도 한다. 자신의 지역구를 위협할 만한 존재로 의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문제는 사표의 이유다. 그동안 TK 지역에는 장차관은 물론 수많은 고위공직자들이 '국회로 가는 길'을 걷고자 사표를 내고 나왔지만, 일부 공직자 출신 의원들이 걸어간 길을 돌아보면 지역민이 아닌 자신을 위한 길로 나 있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자신의 입신양명에 집중했던 공직자 출신 의원들에게 지역 문제는 늘 뒷전이었다. 사표의 이유, 출마의 명분, 지역민을 향한 진심이 결국 부족했던 탓이다. 그 자리를 대신 채운 과잉된 자신감은 또 다른 지역 문제를 낳았고 갈등을 촉발시키기도 했으며, 그 과정에서 지역이 치러야 하는 대가는 혹독했다.

또한 공직자 출신 일부 의원들은 정책에는 전문가였으나 풍부하지 못한 정치 경험 탓에 정치적 상상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정책이란 틀에 갇힌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럴 경우 지역구 발전은 물론 자신 스스로도 존재감 있는 유력 정치인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고위공직자 출신'이라는 정계 진출의 통로를 지나온 이들은 갈수록 늘어갔으나 TK 지역의 정치적 위상과 자생력은 갈수록 하락하고, 지역민의 신뢰도는 낮아지고, 지역 발전은 후퇴하고 있는 이유다.

내년 총선 출마를 위한 공직자 사퇴 기한(선거일 90일 전)인 내년 1월 11일까지 두 달여 남았다. 내년 총선에서 TK 의원직에 나서려는 윤석열 정부의 고위공직자들은 마땅한 이유를 넘어선 울림 있는 이유가 담긴 사표를 낼 수 있었으면 한다. 그런 다음 지역민을 향한 따뜻한 진심과 새로운 지역 혁신, 비전을 담은 출사표를 던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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