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戰後)의 우수와 감성이 어린 1956년 서울 명동의 한 대폿집. 시인 박인환과 조병화 그리고 극작가 이진섭과 가수 나애심이 마주앉아 두런두런 술잔을 나눈다. 그런데 박인환이 무엇에 홀린 듯 일필휘지 시를 써내려간다. 이진섭이 그 시에 바로 곡을 붙이고 나애심이 노래를 부른다. 전란(戰乱)이 남긴 상실과 비련의 정서를 낭만적으로 읊은 명시이자 명곡 '세월이 가면'은 그렇게 즉흥적으로 탄생했다.
EBS 드라마 '명동백작'의 한 장면이다. 그 술집은 탤런트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은성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명동백작'은 1950년대 명동에서 활동했던 문인 박인환 김수영 전혜린 이봉구 오상순과 화가 이중섭, 연출가 이해랑 등의 모습을 통해 당대의 애환을 재조명한 화제의 드라마였다. '명동백작'은 명동이 좋아 명동을 서성이며 '명동'이란 소설집까지 남겼던 작가 이봉구의 별명이기도 했다.
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드나들던 다방 모나리자와 동방쌀롱, 공초 오상순의 단골로 문학 청년들이 모여들던 청동다방, 외상술을 이기지 못하고 머잖아 문을 닫은 술집 포엠, 그 후 포엠과 모나리자․동방쌀롱 등의 빈자리를 대신했던 술집 은성, 전화가 거의 없었던 시절 문인들의 인력시장 역할을 했던 갈채다방, 전혜린과 김수영 등의 발길이 잦았던 클래식 음악다방 돌체 등이 명동의 주요 무대였다.
서울에 이렇게 '명동시대'가 있었다면 대구에는 '향촌동시대'가 있었다. 6.25전쟁과 함께 피란문단이 형성되면서 향촌동은 문화 예술인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한국 문단의 중심지가 되었다. 오상순 김팔봉 마해송 조지훈 박두진 구상 최정희 최태응 등의 문인과 작곡가 김동진, 화가 이중섭 등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전쟁의 후유증을 온몸으로 앓으며 대구에서 피란살이를 했기 때문이다.
향촌동은 전란의 여파와 가난의 질곡에도 낭만이 있었고, 피폐와 절망 속에서도 술이 익고 음악이 흘렀다. 향촌동은 그렇게 풍전등화와 같던 대한민국의 삶 한 가운데를 껴안고 있었다. 현재 향촌문화관이 자리한 골목길 일대가 향촌동시대를 풍미했던 공간이었다. 향촌문화관 앞에 구상 시인이 머물던 화월여관이 있었고, 그 왼쪽 골목에 이중섭이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던 백록다방이 있었다.
정녕 구상 시인을 빼고는 향촌동시대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서울의 이봉구가 '명동백작'이었다면 대구의 구상은 '향촌동 귀공자'였다. 구상은 준수한 용모에다 문학적 감성이 탁월했고 성품이 순후했다. 부인이 왜관에 순심의원을 운영해 경제적인 여유도 있었다. 구상은 그래서 피란문단과 문인 예술가들에게 언제나 푸근한 언덕이었다. 구상은 한국 전시문단의 중심이었다. 향촌동시대의 주역이었다.
구상 시인이 자주 들른 술집이 백록다방 옆 맥주홀 대지바였다. 구상이 향촌동에 모습을 드러내면 거리의 색깔부터 달라졌다고 한다. '빈곤 속의 풍성한 향연'을 예고하는 프롤로그였기 때문이다. 공초 오상순과 소설가 최태응 그리고 화가 이중섭 등 숱한 문인 예술가들이 구상 시인의 후원으로 향촌동시대를 살았다. 특히 이중섭․최태응과는 대구와 왜관에서 동고동락하다시피 했다.
포연에 이지러진 1950년대 그 허무의 강을 여울처럼 흐르다 간 여류작가들의 삶과문학은 더 처연했다. 최정희는 남산동에서 얼룩진 생애의 한때를 보내며 향촌동 피란문인들과 어울렸다. 자그마한 체구의 장덕조가 군복 차림으로 술자리에 드나들며 전쟁의 비감을 한껏 풍겨놓은 곳도 향촌동이었다. 서울 명동에서 그랬듯이 향촌동에서도 문인 예술가들의 활동 무대는 술집과 다방이었다.
화월여관 골목 안에 있던 음악감상실 르네상스는 외신기자들이 '폐허에서 바흐의 음악이 들린다'고 감탄했던 곳이다. 르네상스는 '가고파'의 작곡가 김동진과 '명태'의 시인 양명문의 단골이었다. 음악감상실과 다방에 앉아 회색조의 시름을 피워 올리던 문인 예술가들은 해거름이면 단골 술집에 모여 막걸리 향연을 벌였다. 누가 술값을 내는지도 몰랐다. 외상술을 애써 탓하지 않을 만큼 주모의 인심도 후했다.
술집에서는 문학담론과 음주철학이 무성했다. 마해송의 격조 높은 풍류와 조지훈의 호방한 취중 언행은 늘 술좌석을 압도했다. 구상의 넉넉한 분위기와 최태응의 재치있는 언변은 실의의 술잔에 낭만의 웃음꽃을 피웠다. 안주가 없을 때는 화가 이상범이 고기 그림을 그리고 성악가 권태호가 노래로 응답을 하며 시름을 달랬다. 권태호는 다방 앞을 지팡이로 가로막고 통행세(담뱃값)를 거두곤 했다.
음풍농월의 술집에 비해 다방은 보다 격식있는 문학공간이었다. 전란의 북새통 속에 향수다방과 모나미다방 살으리다방 등에서는 숱한 문인들의 출판기념회가 열리기도 했다. 1953년 7월 6.25 전쟁의 휴전과 함께 피란문인들이 떠나면서 향촌동시대는 막을 내렸다. 서울로 돌아간 사람들은 명동의 문예살롱과 포엠에서 다시 술잔을 기울이며 그리운 목소리로 대구의 향촌동을 떠올렸다.
미증유의 전란 속 그 고립무원의 분지에서, 동족상잔이 저질러놓은 그 폐허의 언저리에서, 눈물어린 술잔 속에 피워올렸던 낭만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명동백작'처럼 드라마 '향촌동 귀공자'가 나왔으면 좋겠다. 향촌동시대 그 애틋한 추억의 잔영을 조망하는 '향촌동 소야곡'이란 제목의 드라마도 괜찮을 것이다. 향촌동시대야말로 오늘날 우리의 실존적 원형을 잉태한 산고(産苦)였기 때문이다.
오래전 서울 한강변에서 타계했던 구상 시인의 유해가 선종 20주기를 앞두고 부인과 함께 낙동강변 '친정'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이다. 칠곡 왜관의 베네딕도 수도원 묘역으로 이장을 한다는 것이다. 차제에, 왜관과 대구 향촌동을 오가며 그 황량한 시절의 후미진 골목에 낭만의 씨앗을 뿌린 시인의 무장무애한 행보에서 잊어버린 우리 문화예술의 지형도를 다시금 들여다볼 일이다.
조향래(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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