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호 작가는 <타자기 치는 남자>, <메이드인 세운상사>, <패션의 신>, <깐느로 가는길>, <세기의 사나이>, <굿모닝 홍콩>을 통해 최원종 연출과 콤비를 이루며 한국 근현대사 시리즈를 파고 있다. 타자기, 홍콩, 세운상가, 깐느, 세기의 사나이의 수사적인 제목 이면(裏面)에는 시대의 은유가 내장되어 있다. 유신, 신군부, 광주사태, 민주화 운동 등 정치적 현상에 조아리고 있는 한국 근현대 정치사의 은폐된 진실을 작가의 시선으로 조준하며 역사적 진실을 타격하고 있는 것이다. 차근호 작가의 신작인 <회수조>(극단 명작옥수수밭, 연출 최원종) 역시 작가적 상상이 영화적이면서도 현실을 타격한다. 최원종 연출은 미래 세계에 70, 80년대 한국 근현대사를 오마주할 수 있는 정치적 파동을 심으며 독재와 통제의 시대를 무대에 부착한다. 공연은 30년 뒤 미래사회를 그리고 있지만, '국가재건위원회', '정의와 상식'을 반복적으로 들추어내는 극 중 인물들의 대사와 장면은 현실을 조준하는 박동(搏動)의 시대적 리듬이 강렬하다. 남산과 남영동 시대를 연상하는 취조와 시민을 감시하는 공안 출신 감찰관의 폭력성, 조직적인 은폐를 보면 임무만 바뀌었을 뿐이다. 공연 속 회수조란 70, 80년대 군부와 백골단을 작가적 상상으로 진화시킨 국가 군대 조직임을 눈치채게 되면, 미래사회라는 돌려차기로 구현된 <회수조> 역시 한국 근현대사 시리즈와 동일한 맥락에 있음을 알게 된다.
◆ 군부와 독재 권력의 국가재건 프로젝트
연극 <회수조>의 시간적 배경은 2042년, 지자기 폭풍이 지구를 강타한 2036년으로부터 6년이 지난 시점의 미래사회이다. 폭풍으로 모든 디지털 테이터가 파괴되고 시민의 예금기록이 삭제된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테이터는 채무기록 뿐이다. <회수조>의 미래사회에서는 '국가재건 프로젝트'가 수행되고, 국가재건 위원회는 용병으로 무장한 군부조직 '회수조'를 통해 조작된 대규모 국가채권을 거둬들인다. 반국가시민단체 활동에 막대한 벌금을 부가하는 국가, 저항은 '발포 명령'으로 통제한다. 회수조는 자산평가사인 리정식(정상훈 분)를 동원해 부동산과 유동자산 가치를 평가하고 막대한 벌금을 부과한다. 미납자는 살아 돌아올 수 없는 노역에 처한다. 국가가 공인한 채권을 회수하는 군조직이 회수조인데, 이들이 살아가는 미래국가에는 반민주주의 독재 권력에 저항하는 시민불복종연대가 공존한다.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몰려든 용병들은 다국적 군대처럼 국가에의 복종만이 주어진 임무다. 차근호 작가는 극 속에 70년대를 연상하게 할 수 있는 '국가재건위원회'를 설정하고, 시민들한테 부과된 벌금을 거둬들이는 국가재건 프로젝트를 가동시킨다. 국가에 납부해야 할 채무기록만이 남겨지고 벌금부과명령서를 이행하는 시민들만이 살아갈 수 있다. 110분의 공연 동안 작가의 플롯을 쫓기 위해 무대에 몰입하게 된다.
극의 구성이 흥미로운 지점은 사건과 갈등의 대립 구도를 연결하는 방식이다. 15장으로 구성된 <회수조>는 극 초반 회수조들이 국가부채채권(벌금)을 폭력적으로 회수하는 과정과 교사들을 중심으로 국가재건위에 저항하는 민주화 모임(불복종시민연대) 활동 정도만 그리면서 내부 협력자 정보를 흘린다. 국가에 반역하는 회수조 내 내부자(반역자) 정보가 공안검사 출신 감찰관(장격수 분)을 통해 흘러나오고, 불복종시민연대의 활동가 제바로프(감기혁 분) 역시 감찰관에게 활동 기밀을 흘리면서 긴장감 넘치는 구도가 형성된다. 회수조 내 내부자(반역자)를 색출하는 극 전개의 구성도 탄력 있다. 가령 회수조의 용병인 라메시는 극의 마지막 대목에서 폭탄을 제조해 시민연대에 협력하는 칼리그룹 과격파 집단 우두머리임이 밝혀진다.
극의 전환점은 회수조의 팀장인 조상인 대위(김동현 분)의 아내 메이(임정은 분)가 국가재건위에 반하는 불복종시민연대를 주도한 핵심자로 밝혀지는 대목이다. 국가재건위는 벌금 5억원을 부과하고, 조상인은 리정식, 라메시(최영도 분)와 협력해 밑장빼기 방식으로 거둬들인 벌금으로 아내를 살리려 한다. 평화시위로는 민주화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 메이는 서울타워 폭파 계획을 세우고 발포 명령자가 남편 조상인임을 알게 된다. 마지막 장면은 삶의 동지이자 이념의 적으로 조우하게 된 메이와 조상인이 총을 들고 대립하고 조상인은 자신의 머리를 향해 총구를 세우고 목숨을 끊는다. 국가의 명령을 수행한 조상인에게 돌아온 것은 죽음뿐이다.
◆불복종시민연대의 저항과 민주화
무대는 집, 지하, 취조실, 시민단체, 학교, 거리로 변환될 수 있도록 레고 조립 방식으로 만들어져 유동적으로 전환된다. 미로처럼도 보이는데, 무대구조를 전환해도 통로는 연결되어 있다. 불복종시민연대는 자유와 상식의 사회를 외치고, 이들의 저항은 발포자의 명령 한마디로 진압된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이후, 차근호 작가가 상상하는 세상은 초고령 사회, 기후변화, 저출산으로 인한 순수혈통의 민족주의가 파괴되고 정치적 이념이 붕괴되어 한국계 외국인들이 한국의 시민사회를 구성한다. 시민불복종연대는 우즈베키스탄, 몽골, 파키스탄, 베트남, 조선족 등으로 꾸려진다. 용병들 역시 한국계 회수조 대장인 조상인을 중심으로, 탈북자 출신 리정식, 해머를 들고 다니는 네팔 출신의 라메시가 한 팀을 이루고 있다. 회수조의 용병과 불복종시민연대에 다국적 인물들을 배치한 것은 다국적 이민자가 살아갈 미래의 한국사회에도 여전히 정치이념의 갈등이 난무할 수 있음을 생각한 듯하다.
<회수조>는 개발도상국의 이민자, 난민과 외국인 노동자가 모여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하는 미래국가의 모습을 그려낸다. 미래국가의 국가재건위원회는 시민들의 저항을 '발포'로 통제하고 회수조는 채권을 받아내며 국가가 개입하는 기록의 조작과 삭제가 이루어진다. 반항하는 자, 국가에 저항하는 자의 가슴에 박히는 것은 총알이다. 70, 80년대의 정치사가 반복되는 30년 뒤 미래사회이다. <회수조>가 그려내는 미래사회는 정의와 상식이 실종되고 전체주의적 통제가 합법화되는 디스토피아의 세상이다. <회수조>의 미래사회는 현재와 연결되는 지점들이 있다. 극 중에서는 강남 지역을 제외하고 다른 지역 시민들에게만 벌금을 부과하는데, 이러한 선택적 벌금 부과는 국가재건위원회 권력층이 부를 축적한 '강남의 나라' 컨트롤 타워이기 때문이다.
<회수조>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등장인물의 설정이다. 한국사 선생님이자 불복종시민연대를 주도한 핵심자를 미얀마 이민자 메이로 설정했는데, 미얀마가 처한 작금의 정치적 현실이 극 중 상황과 묘하게 오버랩된다. 쿠데타로 군부가 권력을 장악하며 정치적 불안이 가중되고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이 분쇄되고 있는 미얀마의 메이는 극 중 시민저항의 상징이다. 70~80년대 한국의 시민사회와 대학, 노동자와 대학생들이 보여준 민주주의를 위한 저항이 여전히 진행 중일 수밖에 없는 한국의 현실을 드러내는 듯하다. 그런 만큼 차근호 작가의 현실사회에 대한 인식은 비관적으로 느껴진다.
국가재건위원회의 군 조직인 회수조의 유혈 진압으로 무고한 희생자가 생겨나고, 불복종시민연대가 발포자를 쫓는 극 중 장면은 5.18 발포 명령자가 실종된 우리의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메이는 회수조 대장인 남편 조상인을 향해 "시민들은 진실을 알고 싶어 해. 왜 당신이 총을 쐈는지. 누가 당신한테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지금도 당신은 그 사람들을 폭도라고 생각하는지." 라고 말하지만, 조상인은 "내 결정 후회하지 않아. 국가가 내린 명령을 수행한 거니까!"라고 답한다. 마지막 장면, 메이를 중심으로 시민혁명이 일어나고 서울타워는 붕괴된다. 독재권력의 종말을 서울타워의 붕괴에 빗대 경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배우들의 연기는 몰입감을 높였는데, 특히 김동현, 정상훈, 최영도 회수조 팀의 캐릭터 앙상블이 좋았다. 감찰관 역의 장격수와 메이 역의 임정은도 장면을 몰고 가는 연기의 리듬감각이 장면 진행의 속도감으로 이어졌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영화적 시퀸스를 무대에 충분히 살려내지 못한 것과 배우들의 대사톤이 극으로 통일되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차근호와 최원종 콤비의 <회수조>는 다른 매체로 확장될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이었고, 오랜 파트너인 차근호의 작의(作意)를 최원종은 무대로 정확히 읽어내고 있었다.
|극단 명작옥수수밭과 연출 최원종은.
극단 명작옥수수밭은 2005년에 창단해 60여편의 작품들을 생산적으로 올리고 있다. 최원종 연출(대표)는 <내 마음의 삼류극장>으로 서울신문 신춘문예 희곡 부분에 당선(2002)되면서 작가로 등단했으며 <외계인의 열정>(한국희곡작가협회 신인작가상(2005), <잘가, 청춘 신기루>(2007),< 청춘의 등짝을 때려라>(2009,서울국제공연예술제 국내작품 선정작), <걸러라 우울한 소년!>(2011), <불루하츠>(2011) 와 서울연극제 공식참가작 <청춘, 간다>(2015)로 6개부문을 수상했다. 이외<에어로빅 보이즈>, <헤비메탈 걸스> 의 대표희곡이 있으며 3권의 희곡집을 펴냈다.
특히 <헤비메탈 걸스>는 한국문화에술위원회 공연예술 창작산실 우수공연과 우수작품 재공연지원, 창작산실 레파토리에 선정되었다. 극단 명작옥수수밭이 재조명을 받기시작한 것은 차근호 작가와 < 한국 근현대사 시리즈>를 선보이면서 부터다. 1910년대부터 6,25를 다루고 잇는 1960년대 패션문화를 그려내고 있는<패션의 신>(2021), 70년의 <어느 마술사의 이야기>(2018), 80년대 폭력의 시대를 조명하고 있는< 타자기 치는 남자>(2021)가 있다. 60년대 패션문화를 다루고 있는 <세기의 사나이>(2019), <메이드 인 세운상사>(2022), <깐느로 가는 길>(2021) 근현대사시리즈 세 작품은 창작산실 올해에 신작으로 선정된바 있으며 극단의대표 작품 < 헤비메탈 걸스>는 오는 12월8일부터 9일까지 광명시민회관 대공연장에서 배우 김동현, 류지훈, 김지은, 오근영, 구옥분, 김수아 무대로 공연된다.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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