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유재경 교수의 수도원 탐방기] 성 요한 수녀원(The Abbey of Saint John)

침묵 속 기도하는 수녀들 공간…누구나 묵상 통해 그리스도에게로

초창기 수도원이었던 성 요한 수녀원은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의 도움으로 8세기에 쿠어의 주교에 의해 건축되었다.
초창기 수도원이었던 성 요한 수녀원은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의 도움으로 8세기에 쿠어의 주교에 의해 건축되었다.

인간은 공간적 존재이다. 인간은 공간을 통해 자신을 정립하고, 공간에서 구체적 삶이 행위되고,공간에서 가능한 삶의 영역을 넓혀간다.그래서 교육철학자 볼노오(O.F.Bollnow)는 공간으로서 집은 '"세계의 중심"이며, 그 안에 거주하는 인간의 근본적 조건이고, 인간은 근본적으로 집에 거주하는 자'라고 했다.

그는 다시 인간이 거주할 공간이 없다면 "인간의 내적 파괴는 피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인간은 거주자로 있을 때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찾을 수 있고, 완전한 의미에서 인간일 수 있고, 인간이 집 안에 거주한다는 사실은 인간이 실존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고 했다. 인간의 거주 공간인 집은 삶이 육화된 장이다.

나는 수도원 탐방 내내 공간을 묵상했다. 수도원은 독특한 공간이다. 수도원은 거주의 공간이면서 거룩을 추구하는 공간이다. 우리는 공간을 바꿀 때, 새로운 공간으로부터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가 구성되는 것을 경험한다. 수도원 역시 인간 실존이 현실에서 구체화 되는 공간이다.

나는 수도승과 수녀들이 만든 공간, 그들이 그 공간을 어떻게 만들어 가는지 궁금했다. 특히 이번에 방문하는 성 요한 수녀원은 8세기에 수도원으로 시작되었지만 12세기 경에는 수녀원이 된 곳이다. 중세 여성들에게 수녀원은 어떤 공간이고, 그곳에서 여성들은 어떻게 빚어졌던 것일까.

초창기 수도원이었던 성 요한 수녀원은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의 도움으로 8세기에 쿠어의 주교에 의해 건축되었다.
초창기 수도원이었던 성 요한 수녀원은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의 도움으로 8세기에 쿠어의 주교에 의해 건축되었다.

◆수도원은 거룩을 추구하는 공간

알프스 고봉을 넘나들며 성 요한 수녀원(The Abbey of Saint John)을 향해 달렸다. 디센티스 수도원에서 쿠어(Chur)를 지나 스위스의 유명한 관광지 다보스(Davos)에 들러, 휴식을 취하며 점심을 먹은 후 다시 길을 나섰다. 해가 중천에 걸려있는 한 여름 오후, 성 요한 수녀원에 도착했다. 성 요한 수녀원은 고요했다. 하늘의 구름조차 숨을 죽이고 있었다. 성 요한 수녀원이 위치한 뮈스테어(Müstair)는 아디제 분지(Adige Basin)에 있는 유일한 스위스 땅이다.

그 곳은 스위스 알프스의 가장 남쪽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다. 성 요한 수녀원은 광활한 초원의 서북쪽 끝에 우아하게 서 있었다. 뮈스테어에서 이탈리아 국경은 걸어서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국경 역시 멀지 않았다. 이곳은 중세와 근대 스위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알프스를 오가는 무역로이자 순례의 길이었으며 순례자나 무역상에겐 더할 나위 없는 안식처였다.

맨 윗줄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다윗 왕의 이야기, 다음 세 줄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그리고 아래쪽 줄은 예수님의 제자 안드레의 십자가의 처형 장면이다. 교회는 프레스코화를 통해 하나님의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줬다.
맨 윗줄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다윗 왕의 이야기, 다음 세 줄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그리고 아래쪽 줄은 예수님의 제자 안드레의 십자가의 처형 장면이다. 교회는 프레스코화를 통해 하나님의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줬다.

성 요한 수녀원의 마을 이름이 뮈스테어(Müstair)인데, 그것은 영어로 Minster에 해당하며 두 단어 모두 라틴어 "monasterium" 즉 수도원을 의미한다. 뮈스테어 마을, 이 말을 형성한 발 뮈스테어(Val Müstair)도 모두 성 요한 수녀원(수도원)에서 나온 명칭이다. 그만큼 성 요한 수녀원이 이 지역에 미친 영향력이 크다.

우리는 성 요한 수녀원 입구에 도착했다. 우리 앞에는 두 개의 수도원 교회가 서 있었다. 그리고 하늘 높이 뻗은 수도원 탑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주거지를 마주하고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다.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작은 가게에는 주인도 손님도 없었다. 우리는 그저 수녀원을 둘러보며 역사를 상기해 봤다.

성 요한 수녀원은 알프스를 오가는 무역로이자 순례의 길이었으며 순례자나 무역상에겐 더할 나위 없는 안식처였다.
성 요한 수녀원은 알프스를 오가는 무역로이자 순례의 길이었으며 순례자나 무역상에겐 더할 나위 없는 안식처였다.

◆순례자나 무역상에겐 더할 나위 없는 안식처

성 요한 수녀원은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Charlemagne)의 도움으로 8세기에 쿠어의 주교에 의해 건축되었다. 샤를마뉴는 774년 이탈리아 근처에서 롬바르드족의 왕으로 대관식을 올린 후, 뮈스테어 근처 스위스와 이탈리아 국경, 엄브레일 패스(Umbrail Pass, 해발 2,501m) 넘다 눈보라를 만나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다행히 그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무사히 돌아왔고, 여기에 대한 감사로 뮈스테어에 성 요한 수도원을 세웠다. 아직도 수녀원 교회 벽에 놓인 조각상에는 그 흔적이 남아있다.

성 요한 수녀원은 쿠어의 주교의 영향 하에 운영되었다. 850년 생 갈렌(St. Gallen) 수도원의 기록에 따르면 45명의 수도승들이 이곳에서 생활했다. 9세기, 10세기에 이르러 이곳은 무슬림의 침략을 받았지만 성 요한 수도원은 피해를 면했다. 성 요한 교회와 성 십자가 교회는 설립 당시부터 있었던 건물이다. 타워 형식의 거주지인 플란타 타워는 10세기가 되어서야 세워졌다.

11세기에 이르러 쿠어의 주교는 수도원 거주지를 확장하며 회랑과 수도원 교회도 세웠다. 성 요한 수도원이 수녀원으로 바뀌어 불린 기록은 1167년에 처음 언급되나 학자들은 그 이전으로 추정한다. 1211년에 최초로 아델하이트(Adelheid) 수녀원장 이름이 등장한다. 이후 수녀원은 주변 정세에 따라 부침을 겪기도 했으나 스위스가 독립은 쟁취하면서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성 요한 교회와 성 십자가 교회는 설립 당시부터 있었던 건물이다. 타워 형식의 거주지인 플란타 타워는 10세기가 되어서야 세워졌다.
성 요한 교회와 성 십자가 교회는 설립 당시부터 있었던 건물이다. 타워 형식의 거주지인 플란타 타워는 10세기가 되어서야 세워졌다.

◆ 하나님의 도움으로 세워진 수도원

오후 늦은 시간 수녀원 가게가 열렸고, 그제야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수녀원 교회 입구에서 왼쪽으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수녀들의 생활 공간과 방문객 객실이 있었다. 그곳에 이르자 50대 후반 아시아계 여성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녀는 필리핀 사람이었다. 같은 아시아 사람이라 그런지 갑자기 수녀원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수녀원 객실이 깨끗하고, 현대식이라 이곳에 오래 머물고 싶었다. 남쪽으로 작은 창이 난 객실, 그 아래 옹기종기 둘러앉은 집들이 한 폭의 그림이었다.

수녀원 정원은 직사각형 형태의 넓은 공간이었다. 정원 한쪽에는 연세 높은 수녀와 젊은 여성이 앉아 있었다. 수녀들이나 방문객들이 고요히 휴식을 취하는 곳이었다. 알프스의 자연과 더불어 사색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방문객 숙소 반대편 북쪽에 수녀들의 공간이 있었다. 수녀들의 공간이 봉쇄지역을 바라보며 다시금 공간을 묵상했다. 공간은 사람의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기능으로 존재한다.

성 요한 수녀원 창문을 통해본 알프스지역 마을집들이 한 폭의 그림이었다.
성 요한 수녀원 창문을 통해본 알프스지역 마을집들이 한 폭의 그림이었다.

무어(H.L. Moore)는 여성은 공간을 통해 역할이나 관계를 만들어간다고 하였다. 그만큼 수녀원의 공간 구성과 공간의 의미는 중요하다. 특히 교회에서 북쪽 공간이 가지는 건축학적 의미는 크다. 하나님이 교회에 있는 성도들을 바라볼 때 북쪽은 우측이다.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십자가형 교회에서도 북쪽은 우측이다. 중세 여성과 수녀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수도원 공간 구성은 중세 기독교 여성의 위치를 새롭게 볼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중세 궁중 시인으로 활동했던 크리스틴(Christine de Pisan)은 모든 사람이 예수를 버렸지만 오직 여성들만이 예수님의 고통과 상처와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이성을 가진 모든 사람은 여성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고, 사랑해야 한다 …. 여자는 남자의 어머니요, 누이요, 친구이다. 남자는 여자를 적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했다.

예배 속에도 깊은 고요가 내려앉은 듯했다. 몇 번의 예배를 함께 했지만 늘 같았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의 침묵 속에 빠진 사람 같았다.
예배 속에도 깊은 고요가 내려앉은 듯했다. 몇 번의 예배를 함께 했지만 늘 같았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의 침묵 속에 빠진 사람 같았다.

◆여성들만이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여

그곳에 있는 며칠간 아침과 저녁 예배에 참석했다. 새벽 미명에 드리는 예배에는 열 명 남짓한 수녀들과 서너 명의 방문객 그리고 한 명의 사제가 전부였다. 검은 수녀복, 고개 숙인 채 옹알거리듯 시편을 읽어 내려갔다. 예배 속에도 깊은 고요가 내려앉은 듯했다. 몇 번의 예배를 함께 했지만 늘 같았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의 침묵 속에 빠진 사람 같았다. 그렇다. 중세 수녀원에서 존경받은 사람은 신분 높은 사람,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깊이 기도한 사람이었다.

나는 중세 수녀들의 경건을 묘사한 버트리의 제임스(James of Vitry)의 말이 떠올랐다. "많은 이들이 그들의 마음에 있는 영적인 달콤함 때문에 그들의 입에서 실제로 꿀맛을 느꼈다.… 한 줄기의 눈물이 그들의 얼굴에 흘러내렸다.… 다른 이들은 너무나 영적으로 고취되어서 거룩한 침묵 속에 하루 종일 조용히 지내곤 했다." 이곳의 수녀들도 하나님의 거룩한 고요 속에 살아왔을 것이다.

우리는 수도원의 중심인 성 요한 교회에 들어섰다. 웅장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였다. 화려한 기둥, 인상적인 스테인드글라스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스테인드글라스로 들어오는 빛이 우리를 다른 신비의 세계로 이끌었다. 교회는 온통 벽화로 가득했다. 벽과 천장은 성경 이야기와 인물이 파노라마처럼 그려져 있었다. 가장 중요한 성경의 이야기가 교회 남쪽 벽에서 서쪽 벽을 거쳐 북쪽까지 다섯 줄로 배열되어 있었다.

맨 윗줄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다윗 왕의 이야기, 다음 세 줄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그리고 아래쪽 줄은 예수님의 제자 안드레의 십자가의 처형 장면이다. 교회는 프레스코화를 통해 하나님의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줬다. 이곳을 찾은 이들은 읽고 쓸 줄 몰라도 누구나 그리스도의 세계를 들어갈 수 있었다. 수녀원 그 공간은 그렇게 우리를 주조하고 있었다.

-물체, 그것의 변화는 곧 나의 변화다-이 물체는 나의 신체이며, 그 신체의 장소는 동시에 나의 장소다.- 임마누엘 칸트

유재경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 영성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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