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총판(도매)과 학원 간 불법 거래가 판을 치면서 동네 서점(소매)이 고사 위기에 처했다. 도서총판이 서점을 거치지 않고 학원 책을 직접 공급하면서 법으로 정해진 할인 폭 보다 훨씬 싼 가격을 책정하고 있다. 또 상당수 학원들은 학원법을 어기고 교재를 직접 판매하고 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 서점 역할 대행하는 학원들
구미에 거주하는 A씨는 최근 딸이 다니는 학원으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자녀에게 교재를 보냈으니 책값을 계좌로 송금하라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책값이 일반 서점보다 비싸다는 점이다. 교재를 서점에서 구매하면 할인이나 마일리지 적립 등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해당 학원에선 정가에 판매했다. 심지어 카드 결제는 물론 현금영수증 발급도 되지 않았다.
A씨는 "학원에서 구매하는 교재가 1년에 9~10권으로, 금액으로 따지면 20만 원 정도 된다. 서점보다 비싸게 구매한 것도 속상한데 현금영수증 발급도 되지 않아 황당했다"며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딸이 다니는 학원이라 어쩔 수 없이 구매했다"고 하소연했다.
현행법상 학원에서 교재를 판매하거나 교재 비용을 징수하는 것은 불법이다. 2011년 개정된 학원의 설립 운영 및 과외교습에 관한 법률 시행령 3조 2항에는 교육청에 신고된 교습비와 지정된 기타 비용 외 학부모에게 다른 비용(교재비 등)을 청구할 수 없다고 명시돼 있다.
교재를 학원 내에서 판매하기 위해서는 '서점업' 사업자 등록을 따로 해야 한다. 이 경우 학원과 분리된 별도의 출입문을 마련해 독립된 공간에서 교재를 판매해야 한다. 이를 위반하면 3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하지만 서점업계는 상당수 학원·교습소 등이 서점업 등록 없이 교재를 판매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모 서점 관계자는 "지난 2011년 학원법이 개정된 후 학원 내 교재 판매를 금지하고 있지만 여전히 상당수 학원이 독립된 공간과 서점업 사업자 등록 없이 교재를 판매하고 있다"며 "사실상 학원이 서점 역할까지 하고 있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 원인은 총판과 학원의 불법 직납거래
서점업계는 학원 내 교재 판매가 구미 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고, 이 문제는 도서총판과 학원 간의 '불법 직납 거래'가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직납 거래란 도서총판(도매)이 서점(소매)을 거치지 않고 학원(소비자)에 책을 직접 공급하는 것을 의미한다. '출판사-도서총판-서점-소비자'로 이어지는 도서유통구조를 파괴한 것이다.
문제는 총판이 법으로 정해진 할인 폭을 어기고 책을 공급한다는 의혹이다.
이른바 '도서정가제'로 불리는 출판문화산업 진흥법 제22조 5항에 따르면 간행물 판매자의 간행물 가격 할인은 정가의 10% 이내에서만 가능하고, 마일리지 제공을 포함한 할인 폭도 15%까지로 제한된다. 이를 위반하면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하지만 지역 서점업계는 "상당수 도서 총판이 학원에 20~30% 할인된 가격으로 교재를 공급하는 등 법을 위반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매일신문이 입수한 구미 B총판과 C학원 간 거래명세서는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해당 명세서에 따르면 B총판은 C학원에 정가 2만1천원인 교재를 1만6천800원에, 2만2천원인 교재를 1만7천600원에 공급했다. 할인율은 20%로, 법으로 정한 할인율(10%)의 두 배다.
구미 한 서점 관계자는 "총판마다 할인율이 조금씩 다르고, 책이나 출판사에 따라서도 차이가 난다. 구미 모 총판의 경우 학원에 책값의 20%를 할인해주고 10%를 마일리지로 적립해주는 등 사실상 30%를 할인해준다"고 말했다.
반면 일반서점은 도서정가제에 따라 최대 10%까지만 할인(마일리지 포함 15%)이 가능하다.
구미지역 서점 운영자는 "일반 서점 가격과 총판 가격이 비교 자체가 안되니 상당수 학원이 총판과 거래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 각종 문제점
지역 서점 운영자들은 도서 총판의 직납 거래가 대형 학원부터 교습소, 소규모 공부방까지 깊숙이 침투해 있고, 이는 경북도내 대다수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안동 모 서점 대표는 "과도한 경쟁을 줄이고 지역 서점을 살리기 위해 도서정가제가 시행 됐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포항시 서점조합 관계자도 "포항지역도 상당수 학원이 총판과 직납 거래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로 반드시 근절돼야 한다"고 밝혔다.
구미 서점 운영자 D씨는 "경북지역 서점조합 관계자와 이야기를 해보면 불법 직납거래가 광범위하게 벌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곳이 그렇지는 않지만 상당수의 총판이 학원들과 불법 직납거래를 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밝혔다.
탈세 의혹도 제기됐다. D씨는 "일부 총판의 경우 종합소득세 납부액을 줄이기 위한 의도로 학원과 무자료 거래(세금계산서를 주고 받지 않는 거래)를 일삼는 등 탈세를 하고 있다"며 "심지어 거래 증거를 없애려고 계산서를 직접 주지 않고 사진을 찍어서 전송하거나, 반품 처리를 통해 (금액을) 빼주기도 한다. 세무당국의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교재는 서점의 주 수입원인데, 총판과 학원 간의 직납거래로 지역 서점들이 존폐 위기에 처했다"고 울분을 토했다.
◆ 입장 엇갈리는 총판들
도서정가제 위반 의혹에 대해 구미지역 총판들 사이에서는 '절대 그런 일 없다'는 쪽과 '대다수 총판이 위반하고 있다'는 쪽으로 의견이 갈린다.
구미 E총판 관계자는 "옛날에는 도서 할인이 자율이었지만 지금은 도서정가제에 따라 10% 할인에 5% 적립, 이 방식대로 책이 나간다. 전산상에도 다 기록돼 있다. 법을 위반하면 벌금을 내야 하는데 그런 짓을 왜 하느냐"고 항변했다.
이와 달리 F총판 관계자는 "우리는 도서정가제를 지키고 있지만 일부 총판은 바로 20%를 할인해준다. 그래서 고객을 많이 빼앗겼다. 만약 이 문제가 대두된다면 그동안 모아놓은 (다른 총판의 거래 관련) 자료를 모두 터트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도서정가제가 무의미할 정도로 (다른 총판의 법 위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다. 구미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국적인 문제"라며 "한번 뒤집어 달라"고 말했다.
구미 모 서점 관계자는 "각 지자체에선 '지역 서점 인증제'를 시행하는 등 동네 서점을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지만, 총판과 학원들은 도 넘은 불법 상거래 행위를 은밀하게 하고 있다. 반드시 바로잡아 올바른 도서유통구조를 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우리나라 출판산업 매출액의 절반 이상은 학습지 및 교육출판 시장이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지난 6월 발표한 '출판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1년 국내 출판시장 총액은 4조5천195억 원이며, 이 가운데 학습지 주력 출판 사업체의 매출액이 1조4천820억 원으로 전체 시장의 32.7%를 차지했고, 교과서 및 학습참고서가 9천437억 원(20.8%)으로 그 뒤를 이었다.
댓글 많은 뉴스
[단독] 수년간 거래내역 사찰?… 대구 신협 조합원 집단소송 제기
"용산의 '사악한 이무기'가 지X발광"…김용태 신부, 시국미사 화제
공세종말점 임박?…누가 진짜 내란범! [석민의News픽]
'대구의 얼굴' 동성로의 끝없는 추락…3분기 공실률 20%, 6년 전의 2배
홍준표 "조기 대선 시 나간다…장이 섰다" 대선 출마 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