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취재현장] 이제 4㎞ 뛰었을 뿐

정우태 경제부 기자
정우태 경제부 기자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유난히 더운 날씨도 한몫했지만, 주식시장을 달군 2차전지 종목을 빼놓을 수 없다. 주가는 연일 고공행진을 거듭했고, 변동 폭이 예상 범위를 벗어나자 애널리스트들은 한동안 전망·분석을 내놓는 것을 포기했다.

지난 7월 10일. 주당 가격이 100만원을 넘어선 '황제주'가 탄생했다. 16년 만에 황제주에 등극한 주인공은 에코프로였다. 배터리 소재 사업으로 전환을 본격화한 포스코그룹 지주사와 계열사 주가도 급등했다. 2차전지 기업들이 코스피·코스닥 시가총액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이제는 이런 분포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산업 전환이 주식시장 지형도를 바꿔 놓은 셈이다.

지역 산업 취재를 맡고 어느 때보다 높은 기대감을 체감한 시기였다. 대구경북에는 배터리의 '심장' 양극재를 생산하는 유망 기업이 다수 포진해 있다. 국내 4대 양극재 기업 중 3곳이 지역에 생산 시설을 마련했다. 2차전지 산업 생태계에서 대구경북은 위상을 공고히 하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이어진 반도체 업황 부진을 만회한 수출 품목도 2차전지였다. 배터리 산업의 잠재력에 의심을 품는 이들은 드물다. 정부도 2차전지 기술이 경제 안보와 직결되는 핵심 분야임을 인식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엘앤에프의 미국 현지 공장 설립을 막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눈에 띄는 성장을 이룬 양극재 기업도 단기간에 성과를 낸 건 아니다. 모두 전기차 전환 이전부터 기술개발을 시작했고, 장기간 영업손실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미래를 보는 선구안과 힘든 시기를 견뎌낸 인내가 산업 전환을 가능케 했다.

엘앤에프는 초창기 디스플레이 소재를 주력으로 했으나, 수익성에 안주하지 않고 신산업 진출을 모색해 양극재 양산에 성공했다. 에코프로는 대기업도 포기한 양극재 사업에 매진했고, 2차전지 소재 분야 수직계열화를 통해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췄다. 일찍이 해외 자원 개발에 공을 들인 포스코그룹의 뚝심은 국가 간 자원 쟁탈전이 치열해진 지금 더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섬유산업의 추락, 모바일·디스플레이 대기업의 이탈로 장기간 침체를 겪은 대구경북은 새로운 주력 산업의 부상에 주목하고 있다. 배터리는 전기차의 성능을 결정하고, 양극재는 배터리의 에너지 밀도를 좌우한다. 양극재를 포함한 배터리 소재 기업들이 모빌리티 혁명을 주도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배터리 산업도 정체기를 맞을 것이란 위기론이 제기되고 있다. 전기차 시장이 둔화하면서 배터리 수요에도 여파가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수 시장에 집중해 왔던 중국의 추격도 거세졌다. 게다가 한국 배터리사의 해외 합작공장 설립 추진이 철회, 혹은 연기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위기의식은 더 커졌다.

이런 상황에도 배터리 업계는 오히려 차분한 분위기다. 속도 조절을 통해 더 큰 도약을 준비하는 또 하나의 기회로 보고 있다. 권영수 한국배터리산업협회장은 이달 1일 열린 '배터리 산업의 날' 기념식에서 "배터리 사업은 마라톤 42.195㎞에서 이제 4㎞ 정도 뛰었다"며 "급히 성장하며 간과한 점들을 다지다 보면 배터리가 한 번 더 도약할 시간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다. 단기적인 오르내림이 있더라도 장기적인 레이스에 집중해야 할 시점이다. 오래달리기를 잘하는 법은 단순하다. 페이스를 잃지 않아야 결승선에 도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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