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충격의 여진이 가시지 않는 코로나19 재난의 교훈은 무엇일까? 희망적으로 보면 팬데믹으로 단절된 세상을 온라인으로 연결하여 지속가능한 공동체의 가능성을 일깨웠다는 것이다. 반면 중증 환자가 속출해도 병상과 인력 부족으로 억울한 죽음을 방관해야 했듯이, 생명의 존엄을 지키려는 국가의 소명의식과 예방체계의 부전은 비관적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이미 100년 전 식민지 조선에서 경험된 바 있다. 당시 온 국토를 휩쓴 스페인 독감에 인구의 38%가 감염되고 14만명이 사망한 대환란을 겪었다. 과학기술의 진보를 감안하면 100년 전과 후의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결국 재난관리의 성패는 과학기술에 앞서 국가의 의지와 정책에 달려 있다.
유엔개발계획은 1994년 결핍과 공포로부터의 인간안보를 국가와 국제사회의 책무로 처음 공표했다. 이는 안보가 곧 국가안보를 뜻하고 그것을 위해 개인은 마땅히 희생될 수 있다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전통 관념과 배치된다. 바꾸어 말해 국민의 안녕과 복리를 증장시키는 것이 국가의 책무이자 공동체 발전의 근간이라는 활사개공(活私開公)의 관념이 현대정치의 테마로 부상하였다. 이 시각에서 보면 전쟁이나 독재 같은 인위적 억압을 제외할 경우 질병은 인간안보의 최대 위협 중 하나이다. 2023년 9월 3일 현재 코로나 19로 인한 국내 누적 확진자수 3천443만6천586명, 사망자수 3만5천812명의 공식 집계가 이를 증빙한다.
국제노동기구는 재난과 같은 비상한 상황에서도 지속해야 할 공무로 필수노동을 제시했다. 필수노동 분야는 '그것이 중단된다면 인간의 생명, 개인의 안전, 국민의 건강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는 부문'이다.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은 일찍이 필수서비스 정책을 도입하여 재난관리 인력과 인프라를 발전시켜왔다. 우리나라의 경우 서울의 성동구가 2020년 처음으로 '서울특별시 성동구 필수 노동자 보호 및 지원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였다. 이어서 2021년 국회가 '필수업무 지정 및 종사자 보호 지원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였다. 코로나 19가 절정에 달한 시기의 뒤늦은 입법이었지만 전향적인 대응이었다. 그럼에도 재난관리 인프라와 인력은 여전히 부족한 상태이다. 그 핵심 이유는 팬데믹 위협의 최전선을 지켜야 할 필수의료서비스가 정체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필수의료서비스의 문제점은 궁극적으로 기형적인 의료인력 공급에 기인한다. 주지하듯이 의사 배출 규모는 의대입학 정원과 비례하는데 그 수가 2006년부터 3천58명으로 동결되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인구 1천 명당 의사수는 OECD 평균 3.7명에 한참 못 미치는 2.6명에 불과하다. 나아가 전국 40개 의과대학 중 수도권 소재 대학은 13개에 불과하지만 전공의의 61.6%가 수도권에서 의료에 종사하고 있다. 지역인구 1만명 기준 전공의 정원수는 대구 9.1명, 경북 1.36명으로 처참한 지경이다. 요컨대 의대입시 광풍이 보여주듯이 전체 입시생 중 최상위 0.6%만 진입할 수 있는 시장에서 육성된 인력의 다수가 수도권에 공급되는 불균형이 구조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지방의 경우 민간의료는 물론 지역거점 공공병원조차 인력난에 허덕이는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의대입학 정원을 1천 명 이상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필수의료와 지방의료 붕괴를 막겠다는 결연한 의지도 덧붙였다. 환영받아 마땅하지만 기우가 앞서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미 3년 전 문재인 정부가 의대정원 1천 명 확대와 공공의대 설립을 공표한 바 있으나 대한의사협회의 저항에 종적을 감추었다. 또한 역대 정부에서 의대정원 확대 논의는 늘 의사 단체의 압력에 꼬리를 내렸다. 코로나 19 등으로 국민 생명이 사지를 헤매는 환란에도 18년간 의대 정원이 동결된 원인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울러 국민과 정부를 한껏 휘두를 수 있는 이익집단의 권능에 놀랄 뿐이다. 과거의 정책실패는 국민을 믿고 정책을 테이블 너머로 밀어붙이지 못했다는 데 있다. 이제는 과·독점시장을 지키는 기득권을 무너뜨리고 필수의료서비스와 지역불균형을 정상화해야 할 때이다. 정부는 정책을 공론화하고 정당들은 22대 총선에서 경쟁적인 공약으로 국민의 지지를 최대화해야 한다. 더 이상 정책을 테이블 위의 놀음으로 환원하지 말라. 정책은 정치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국가의 소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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