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문환의 세계사] 엑스포 최고의 유산 프랑스 파리 에펠탑

1889년 佛 대혁명 엑스포서 철강산업 상징 출품작으로 선정
처음에는 도시 미관 해치는 흉물…방송탑 활용되자 랜드마크 인정

에펠탑은 1889년 파리 세계박람회 기념물로 만들었다.
에펠탑은 1889년 파리 세계박람회 기념물로 만들었다.

2030 세계박람회, 일명 엑스포(Expo) 개최지 결정이 오는 28일로 다가왔다. 우리 부산과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 이탈리아 수도 로마가 치열한 3파전을 벌인다. 1928년 결성된 국제박람회기구 BIE(Bureau International des Expositions) 본부가 있는 파리에서 182개 회원국 투표로 개최지를 가린다. 평등한 1국가 1표다.

182개 국가의 표심을 잡기 위해 윤석열 정부는 출범 뒤, 정책 역량을 총동원해 유치활동을 펼쳐왔다. 지난 9월 유엔 총회를 비롯해 윤 대통령은 취임 1년 반동안 92개국 정상과 142회 정상회담을 가지며 부산 엑스포 유치 의제를 다뤘다. 국내 대기업 회장들이나 경영진은 물론 한류 스타들도 적극적으로 팔을 걷어부쳤다.

경쟁 도시에 비해 늦게 뛰어들었지만, 치열한 접전을 벌인다는 분석이 나오는 것은 그만큼 민관이 합심해 노력을 펼친 결과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결과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다지며 세계박람회의 역사로 들어가본다.

에펠탑과 파리 시가지
에펠탑과 파리 시가지

◆프랑스 에펠탑, 파리 세계박람회 기념물

프랑스 파리로 가보자. 가을의 주제곡, 1946년 이브몽탕이 처음 부른 고엽(Les Feuilles Mortes)의 그윽한 선율이 울려퍼지는 센 강변에 금자탑이 눈에 들어온다. 높이 324m의 에펠탑을 보기 좋은 위치는 3곳이다. 우선 군사학교(Ecole Militaire) 앞 마르스 광장이 꼽힌다. 군사학교는 1751년 루이 15세가 장교 양성 목적으로 세웠다. 1784년 나폴레옹이 입학해 2년 과정을 월반한 뒤, 1년 만에 포병 소위로 임관한 학교다.

1789년 터진 프랑스 대혁명은 코르시카 출신의 무명 나폴레옹을 역사적인 인물로 키웠다. 1795년 나폴레옹이 포부대를 이끌고 반혁명 세력을 일소하며 위기에 빠진 혁명을 구했기 때문이다. 비록 1804년 황제가 되며 혁명을 뒤엎어 버렸지만... 군사학교 근처에 나폴레옹 묘소 엥발리드도 자리한다.

에펠탑 조망 2번째 포토존은 센강 비르하켐 다리다. 에펠탑 서쪽 정경과 센강이 어울어진 입체적 구도가 잡힌다. 가장 많은 인파가 몰리는 장소는 센강 이에나 다리 북쪽 샤이요궁 테라스다. 현재 인류박물관으로 활용되는 샤이요궁 테라스에 서면 에펠탑 북쪽 전경이 기막히게 펼쳐진다. 프랑스의 상징 에펠탑은 왜 만든 것일까? 엑스포 기념물이다.

개선문에서 본 에펠탑과 파리 시가지
개선문에서 본 에펠탑과 파리 시가지

◆ 구스타프 에펠, 뉴욕 자유 여신상 만든 기술로 에펠탑 건축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1889년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주제로 엑스포가 열렸다. 상징 기념물 공모전 컨셉은 철강산업. 1870년 제3공화국을 출범시켜 민주공화국을 일군 프랑스는 영국에 이어 선진 공업국가로 거듭나는 중이었다. 산업의 핵심, 철강 생산능력을 상징할 기념물 공모전에서 구스타프 에펠의 출품작이 뽑혔다.

에펠은 이에 앞서 미국 뉴욕 자유의 여신상 제작에 참여한 전문가였다. 프랑스 국민 성금으로 만들어 미국에 건네진 자유의 여신상제작시 철제 비게 공법을 적용한 인물이 에펠이다. 1886년 뉴욕 자유의 여신상, 1889년 파리 에펠탑. 아메리카와 유럽을 상징하는 2개의 기념물이 에펠의 손끝에서 피어난 셈이다.

에펠탑은 1887년 1월 28일 공사에 들어가 2년여만인 1889년 3월 31일 준공식을 가졌다. 1889년 5월 5일 파리 엑스포 개장에 맞춰 6일부터 일반에 문을 열었다. 에펠탑 덕분에 1889년 파리 엑스포는 흔한 말로 대박을 쳤다. 10월 31일까지 6개월간 진행된 엑스포에 35개국이 참여하고, 무려 3천250만여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에펠탑이 인기만 얻었을까?

에펠탑 아치 뒤로 보이는 마르스 광장과 프랑스 군사학교. 나폴레옹은 1785년 이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에펠탑 아치 뒤로 보이는 마르스 광장과 프랑스 군사학교. 나폴레옹은 1785년 이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20년 허가 에펠탑 해체위기... 방송기술 덕분에 살아남아

파리의 또 다른 명물 샹젤리제 개선문으로 가보자. 나폴레옹이 만든 개선문 꼭대기 전망대에 올라 보면 파리의 고풍스러운 석조건축물과 철골 구조 에펠탑이 부조화의 조화를 이룬다. 건축 당시 에펠탑은 도시미관을 해치는 흉물로 취급받았다.

『여자의 일생』으로 널리 알려진 세계적인 단편 소설가 모파상은 매일 점심을 에펠탑 내부 식당에서 먹었다. 그 이유를 물으니 파리에서 유일하게 에펠탑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답을 내놨다. 재치문답을 넘어 혐오가 읽힌다. 에펠탑은 세계박람회 개최 당시 20년 시한부였다. 하지만, 이미 파리의 명물로 자리 잡은 에펠탑 철거 반대 여론이 일었다.

에펠탑 내부 철구조물. 제작 당시 고풍스러운 석조도시 파리의 흉물로 비판받으며 20년 뒤 헐릴 예정이었다.
에펠탑 내부 철구조물. 제작 당시 고풍스러운 석조도시 파리의 흉물로 비판받으며 20년 뒤 헐릴 예정이었다.

무엇보다 21세기 들어 발전한 방송기술이 에펠탑의 명줄을 늘렸다. 방송탑 활용. 1876년 벨이 유선전화기, 1901년 캐나다 페세덴이 무선 전파 목소리 전달 기술을 선보였다. 1904년 영국의 플레밍은 2극 진공관을 발명하고, 1906년 미국의 리 드 포리스트는 3극 진공관을 발명한데 이어 1908년 에펠탑에서 최초의 라디오 실험방송까지 마쳤다. 1909년 20년 허가 만기로 해체위기에 몰렸던 에펠탑이 구사일생의 구세주, 방송을 만난 거다.

1918년 에펠탑에 라디오 송신탑이 설치되고, 1923년 프랑스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면서 에펠탑의 위치는 공고해졌다.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올랐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기념물로 격을 높였다. 하루 2만5천명, 1년 9백만여명이 찾는다. 모파상이 지하에서 에펠탑을 바라보며 바게뜨를 베어 물지도 모르겠다

버킹검궁. 뒤쪽 숲이 그린 파크와 하이드 파크다. 1851년 하이드 파크에서 제1회 세계 엑스포가 열렸다.
버킹검궁. 뒤쪽 숲이 그린 파크와 하이드 파크다. 1851년 하이드 파크에서 제1회 세계 엑스포가 열렸다.

◆조선, 1889년 파리 엑스포에 첫 대표단 파견

한국은 언제 처음 엑스포와 만났을까? 1889년 에펠탑, 파리 엑스포다. 1883년 조미 수교 이후 외교사절 보빙사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마침 열리던 보스턴 기술공업박람회에 비공식으로 물품을 출품한 적은 있다. 하지만, 정부 공식 사절단이 간 것은 1889년 파리 엑스포가 최초다. 전시관을 열지는 못했다.

민영찬이 이끈 사절단이 당시 에펠탑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진다. 이후 1893 시카고 엑스포, 1900년 파리 엑스포에 조선 정부와 대한제국은 전시관을 마련하고 물품도 선보였다. 이후 다시 참가한 것은 1962년 미국 시애틀 대회에 대한민국 이름으로다. 그 후 61년 만인 올해 엑스포 유치라는 화룡점정을 찍을지 두고 볼 일이다. 엑스포는 인류 역사에 언제 처음 등장했을까?

버킹검궁 빅토리아 여왕 동상. 빅토리아 여왕이 1851년 1회 세계 엑스포 개회를 선언했다.
버킹검궁 빅토리아 여왕 동상. 빅토리아 여왕이 1851년 1회 세계 엑스포 개회를 선언했다.

◆1851년 영국 하이드파크에서 1회 엑스포 개최

19세기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세계 최고 공업국이던 영국 런던으로 가보자. 영국 왕실의 거처 버킹검궁에서 동쪽으로는 세인트 제임스 파크와 영국 정치 중심지 웨스트민스터구가 펼쳐진다. 버킹검궁 서쪽으로는 그린 파크와 드넓은 하이드 파크가 붙었다. 버킹검궁 앞 광장에는 빅토리아 여왕 조각이 우뚝 솟았다. 이 빅토리아 여왕이 1851년 5월 1일 하이드 파크 수정궁(Crystal Palace)에서 제1회 엑스포 개막을 선언했다.

수정궁은 철골에 유리를 덮은 유리온실 구조다. 길이 564m, 높이 39m로 축구장 18개 크기다. 투명 수정처럼 보여 수정궁으로 불리던 개최장소는 1936년 화재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776년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발명으로 생산 혁명, 1825년 철도로 유통혁명을 일군 영국의 산업성장 과시 자리가 1회 엑스포였다.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 세계 엑스포와 올림픽 포스터. 1900년 파리와 1904년 세인트루이스 엑스포는 올림픽과 공동으로 열렸다. 아테네 올림픽 스타디움 기념관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 세계 엑스포와 올림픽 포스터. 1900년 파리와 1904년 세인트루이스 엑스포는 올림픽과 공동으로 열렸다. 아테네 올림픽 스타디움 기념관

◆엑스포와 올림픽 동시개최

1896년 현대 올림픽 부활 뒤, 1900년 파리올림픽,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은 세계엑스포와 동시 개최됐다. 현재 엑스포는 2종류다. 등록 엑스포(Registered Expositions)는 인간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다룬다. 개최 기간은 보통 6개월이다. 5년 주기로 열린다. 참가국이 자국전시관을 비롯해 참가 비용을 댄다. 인정 엑스포(Recognized Expositions)는 등록 엑스포가 개최되는 사이에 열린다.

기간은 보통 3개월이다. 개최국이 모든 시설을 준비하며 주제도 특정 분야로 제한된다. 1993년 대전 과학 엑스포, 2012년 여수 해양 엑스포가 그 예다. 1889년 에펠탑의 파리 엑스포에 전시관도 없이 처음 참가했던 한국은 이제 21세기 세계 경제와 문화 영역에서 독보적인 영역을 굳혔다. 등록 엑스포를 개최할 여건이 무르익었다. 좋은 결과를 기대해 본다.

김문환 역사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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