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칼럼] 반대 의견을 겁내지 않는 진정한 소통

미 국무부 '반대 채널' 통해 외교관도 대외 정책에 반대 목소리
윤석열 대통령 "국민 소통, 현장 소통, 당정 소통 강화" 주문
반대 의견도 귀담아 듣는 진정한 소통이 절실한 시기

김수용 논설실장
김수용 논설실장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제국주의 열강들로부터 독립한 많은 나라들은 피눈물 가득한 질곡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방글라데시가 대표적이다. 1947년 인도 대륙은 인도와 파키스탄 2개 나라로 나뉜다. 기준은 종교. 대륙 한가운데 힌두교의 나라 인도를 두고 직선거리로 2천㎞ 떨어진 서쪽과 동쪽에 이슬람교의 파키스탄이 생겼다. 종교만 같을 뿐 민족, 언어, 문화도 전혀 다르다. 인구는 동파키스탄(현 방글라데시)이 훨씬 많았지만 권력은 서파키스탄(현 파키스탄)이 독차지했다. 차별과 착취에 시달린 동파키스탄의 자치권 요구는 독립전쟁(1971년 3~12월)으로 이어졌고, 파키스탄 군대와 친파키스탄 민병대는 벵갈인 30만~300만 명을 죽였고, 여성 20만~40만 명을 강간했다. 피해 범위가 부정확한 것은 엄정한 조사가 없었던 탓이다. 파키스탄을 교두보로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골몰했던 미국은 이를 외면하고, 친파키스탄 정책을 고수했다.

여기서 '블러드 전문'(Blood Telegram)이 등장한다. 동파키스탄 다카 주재 미국 총영사 아처 블러드(1923~2004)는 1971년 4월 6일 동료 외교관 20명과 함께 대학살의 장본인인 파키스탄 독재자 야히아 칸을 지지하는 미국 외교 정책을 비판한 '반대 전문'을 보냈다. 미국 정부는 묵살했고, 블러드는 국무부 인사과로 전보됐다.

베트남전을 계기로 도입된 미 국무부의 이견 제시 통로, '반대 채널'(dissent channel)이 다시 뉴스에 등장했다. 채널의 첫 사용자가 바로 블러드였다. 지난 9일 미국 CBS방송은 중동권 외교관들이 이스라엘 정책에 이견을 나타낸 반대 전문을 제출했다고 보도했다. 비공개가 원칙인 반대 전문이 접수되면 국무부 최고위층에 전달하고 30~60일 안에 작성자에게 답해야 한다. 국익을 다루는 외교는 극히 비밀스러운 영역이다. 겉과 속이 달라야 하고, 상부 지침이 충실히 이행돼야 한다. 그런데 반대 채널이 존재한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정치적 결정에 대한 현실적 수정 또는 보완을 도모하려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만든 것인데, 최소한 소통 창구는 열어 둔다는 의미다.

얼마 전 이공계 연구개발 예산 관련 기사에서 한국원자력연구원 한 선임연구원의 인터뷰는 안타깝고 충격적이다. 탈원전을 주창한 문재인 정부 때는 비록 의견을 들어 주지 않더라도 소통 채널은 확실했고 일이 생기면 과학기술 담당 비서관이 바로 반응했는데, 지금은 대통령실과의 거리가 굉장히 먼 것 같다고 했다. 현장에 오지도 않는 관료들의 입장이 곧바로 대통령실의 정책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소통(疏通)은 막히지 않고 잘 뚫린다는 뜻이고, 반대는 경색(梗塞)이다. 흔히 대화를 소통과 유사하게 보지만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대화는 불통과 동의어다. 소통은 상대를 배려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민생 현장을 직접 돌아본 뒤 "저와 우리 정부는 국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것"이라고 밝혔고,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국민 소통, 현장 소통, 당정 소통을 더 강화해 달라"고 주문했다.

지극히 옳은 말이지만 우려와 불신의 시선도 크다. 필요하면 인적 쇄신도 해야 하고, 국정 기조도 바꿔야 한다. '반대 의견'에 대한 겸허한 청취 없이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하고, 국가 운영의 추진력도 잃을 수밖에 없다. 지난 2022년 미국은 블러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국무부 남중아시아국 회의실에 그의 이름을 내걸었다. 무모하지만 용기 있는 반대 의견이 끼친 영향력을 잘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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