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기념관'이 대구 남산동에 개관했다. 기쁜 소식이다. 이육사 시인의 고향은 경북 안동 원천마을이다. 이 고향 마을에 이육사문학관이 있다. 이육사 시인의 고결한 생애와 기개 가득한 문학정신을 기리는 뜻깊은 공간이 안동 원천마을에 자리한 이육사문학관이다.
이육사 시인은 조선 성리학의 지주 퇴계 이황의 후손이다. 이육사 시인의 부친 이가호는 퇴계 이황의 13대손이다. 이육사 시인의 꺾이지 않는 정신의 원천이 이렇다. 이육사 시인은 1938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수필 '계절의 오행'에서 집안의 '무서운 규모'를 거론했다. '무서운 규모'는 다름 아닌 가계의 무게이다. 게다가 이육사 시인의 모친 허길은 구미 출신 의병장 범산 허형의 따님이다. 허길은 왕산 허위의 종질녀이다. 왕산 허위가 누구던가. 경성 감옥 제1호 순국자 아니던가.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된다. 망국은 시간문제였다. 이때 망국을 방관할 수 없어 의병을 이끌고 서울진공작전을 펼친 의인이 왕산 허위이다. 이육사 시인의 외가도 이렇다. 이육사 시인은 시 '절정'에서 자신이 매운 계절의 채찍에 쫓겨 마침내 북방까지 휩쓸려 오게 되었노라고 비장하게 노래했다. 그런데 이육사 시인은 극한까지 내몰린 시인이었으나 무릎을 꿇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육사 시인과 대구 남산동은 어떤 인연이 있을까? 이육사 시인의 본래 이름은 이원록이다. 이원록은 부친 이가호, 모친 허형의 여섯 아들 중 차남이다. 이원록의 부모는 1923년 거처를 안동 원천마을에서 대구 남산동 662번지로 옮긴다. 이때 이원록의 나이 20세.
1927년 10월 18일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 투척 사건이 발생한다. 칠곡 출신 장진홍 의사의 의로운 의열투쟁의 결과다. 이원록은 맏형 이원기와 함께 일경에 의해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대구형무소에 1년 7개월간 투옥된다. 이원기, 이원록이 이 사건의 배후였을까? 배후는 아니다. 그런데 형제가 무려 1년 7개월간 투옥된다. 무슨 일일까? 형제는 일제 경찰의 요시찰 인물이었다. '불령선인'이었다.
특히 이원록이 그러했다. 이원록은 장진홍 의사 사건이 있기 전부터 중국 북경을 출입했다. 왜 북경일까? 당시 북경은 의열 독립투쟁의 요람이었다. 외교론을 주장한 임시정부의 소재지 상해와 분위기가 달랐다. 또한 북경에는 비타협적 독립투쟁을 우선한 경북 출신 독립지사들이 있었다. 이원록이 이들과 교류한 게 명백하다. 이원록은 중국 북경을 출입하며 독립투쟁을 자신의 과제로 받아들인다.
이를 모를 일제 경찰이 아니다. 중국 북경을 다녀온 이원록은 남산동 집에만 있지 않았다. 조양회관이 주최하는 신문화 강좌에 참여한 이원록이었다. 조양회관에서 또래의 독립투쟁 동지들도 만났을 것이다. 일제 경찰의 눈에 이원록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일제 경찰은 어떻든 이원록을 세상과 격리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제 경찰은 이원록의 정신까지 격리시킬 수 없었다. 이원록은 대구형무소에서 이육사 시인으로 거듭난다. 자신의 수인 번호가 264번이었다. 이원록, 아니 이육사 시인은 장진홍 의사 사건 이후에도 대구 청년동맹 사건, 대구 격문 사건 등으로 투옥을 반복한다.
이육사 시인 덕분에 한국문학사는 그나마 거룩해질 수 있었다. 훼절하지 않는 고결한 정신으로 '내가 바라는 손님은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노래한 이육사 시인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장소가 바로 남산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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