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시단(詩壇)에 이변이 일고 있다. 잘나가던 서점들도 줄줄이 문을 닫는 판에, 시집만 파는 독립책방이 지난 6월 대구에서 문을 열었다. 수많은 시인이 오랜 산고 끝에 자비출판한 시집들이 제대로 판로를 찾지 못하고 포장 박스에 갇힌 채 폐지 공장으로 실려 갈 날만 기다리고 있을 때, 이 시집들을 한 곳에 모아 놓고 독자들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대구에 시인이 700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들이 펴내는 '시집'도 그만큼 많을 것이다. 특히 자비출판 시집들 가운데 대다수는 시인의 집에서 먼지만 덮어쓰고 있다가, 나중에 어쩔 수 없어 한 뭉치씩 모두 폐지로 처리된다고 한다. 엄청난 낭비요 국가적 손실이다. 물자 낭비나 경제적 손실로만 따질 게 아니다. 그 책 속에 실린, 혼이 담긴 작품을 생각하면 저자 '시인'으로선 가히 억장이 무너질 일이다. 소설이나 에세이, 동시나 동화도 마찬가지다.
책방 대표는 이 기형적인 자비출판 서적의 유통구조에 대안을 찾아보고자 시인들의 집에 쌓여 있는 시집을 모아서 위탁 판매하는, '시집만 파는 책방'을 준비했다. 책방 개업을 앞두고 한 달 만에 대구·경북 시인 110여 명이 참여했다. 대다수 시인이 저마다 10권씩 보내 왔다. 한 달 만에 시집을 1천 권 넘게 받아 문을 열게 된 것이다. 대구·경북 밖에서도 참여하겠다는 시인들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이 책방은 '시'에 보다 집중하기 위해서 다른 책방처럼 커피나 예쁜 소품은 팔지 않는다. 그리고 책방에 찾아온 독자가 '좋은 시집'을 추천해 달라고 해도 특정 시집을 추천해 주지 않는다. 이곳 책방에 책 표지가 보이도록 비치된 280여 종 시집 모두가 '좋은 시집'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집 가운데 일찍 매진된 시집은, 당분간 추가 요청하지 않는 것도 유별나다. 잘 팔리는 시집을 계속 들여놓는 것도 좋겠으나, 한 권도 팔리지 않은 시집이 남아 있으므로 그들에게 좀 더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이 별난 책방에선 시집을 정가의 10% 할인가에 팔고, 판매 대금의 60%를 저자에게 보낸다. 일부 시인들이 "판매된 책값은 보내지 말고 책방 살림에 보태면 좋겠다"며 계좌번호를 알려주지 않으면, 그 시인의 시집은 계좌번호를 보내 줄 때까지 책장에 진열하지 않는다.
최근 대구수필가협회에서는 "시집 전문 책방이 문을 열었는데, 우리는 '에세이 전문 책방'을 검토해 보자"고 하고 있단다. 대구의 어느 여류 시인은 경북 칠곡군 시골 마을 옛집을 리모델링해서 이 책방처럼 시집 전문 책방을 차려보겠다고 준비하고 있다. 갓 태어난 이 작은 책방 때문에 우리 출판 독서문화에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 책방지기가 책방을 차려 가면서 기록한 책 '일흔에 쓴 창업일기'엔 "어려운 여건 속에서 동네마다 들어서는 작은 책방들이 우리 문화생태계에, 나아가 우리 일상에 새로운 진화의 동력으로 수혈되면 좋겠습니다. 골목마다 카페가 늘어나면서 커피 수요가 폭증하듯이, 동네마다 이런저런 책방들이 많이 생긴다면, 지하철이나 버스에 스마트폰 대신 책을 드는 승객이 늘어날지 모릅니다.…" 이렇듯 이곳 책방지기는 작은 책방 안에서 남다른 넓고 큰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편 이 시집만 파는 책방 '산 아래 詩(시)'가 오래오래 우리 곁에 함께할 수 있도록, 대구시인협회에서는 '대구시인협회 자매책방'으로 인연을 맺고 그 활성화 방안을 다양하게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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