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서명수 칼럼]장제원의 관광버스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100만 명 이상의 지지자들을 동원하는 대규모 군중집회가 지지세 과시로 오인되던 시대가 있었다. 민주화 이후 첫 대선 레이스가 펼쳐진 1987년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가 여의도 광장에 130만 명의 군중집회로 기세를 올리자, 이에 뒤질세라 김영삼 후보도 130만 명 집회로 맞대응한 바 있다. 호각지세의 군중집회 대결은 결국 노태우 대통령 탄생으로 귀결이 됐다.

대규모 군중집회의 짜릿한 기억은 이후 정치권은 물론 노동계도 벗어날 수 없는 온 나라를 휩쓴 악마의 유혹과도 같았다. 봇물 터진 민주화 열기는 광화문 광장을 점령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진 2017년 촛불집회는 군중집회의 절정이었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보수 단체가 주축이 된 반정부 시위 행렬은 광화문 일대를 장악하다시피 했고, 조국 사태 당시 진보 진영이 주도한 서초동 촛불집회 역시 '숫자'에 연연했다.

민주주의는 다수(多數)라는 숫자가 이끄는 정치 방식이다. 한 사람의 목소리보다는 다수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권력자에게도 압박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군중이 목소리를 낸다고 해서 대통령이 물러나거나 정권이 무너지고 정부 정책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숫자'에 연연한다. 노동계의 집회 현장을 보도하는 언론 기사도 예외 없이 집회 인원을 추산해서 덧붙이곤 했다.

관광버스를 이용한 대규모 군중을 동원해 온 군중집회에 드는 고비용 등 폐해에 대해 공감한 정치권의 자성(?)으로 대선과 총선 등 각종 선거에서 세 과시형 군중집회는 거의 사라지는 듯했다. 정당의 전당대회 등에서 간혹 보이는 관광버스를 동원한 대의원 실어 나르기 형태도 그다지 문제될 정도는 아니었다.

불과 일주일여 전, 국민의힘 장제원 의원이 무려 92대의 관광버스를 동원해 자신의 외곽 조직 격인 '여원산악회' 창립 15주년 행사를 갖고 세 과시를 한 사실이 세간의 화제로 떠올랐다. 4천200여 명에 이르는 지역구 주민을 모아 놓고 "알량한 정치 인생을 연장하기 위해 (부산 사상구를 버리고) 험지에 가지 않겠다"며 험지 출마 거부를 선언했다. 인요한 국민의힘 혁신위의 '험지 출마' 요청을 걷어찬 것이다.

장 의원은 지난 대선에서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를 막후에서 성사시키는 등 윤석열 대통령 당선을 도운 일등 공신으로 국정 운영 전반에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윤핵관'으로 대중에 깊이 각인된 바 있다.

장 의원의 험지 출마나 불출마는 윤 대통령 핵심 측근들의 자기희생을 보여주는 정치적 신호탄으로 국민의힘 중진 의원들과 정치권이 장 의원의 거취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런 판국에 꺼내 든 장 의원의 '관광버스 카드'는 최악의 정치적 선택이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장 의원의 정치적 영향력이 실제와 달리 부풀려졌다거나 정권 초기와는 달라졌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국민들에게 '미운 털이 잔뜩 박힌' 윤핵관을 대표하는 인사의 처신으로는 맞지 않는 데다가 윤 대통령에 대한 항명으로 해석될 수도 있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만은 틀림없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극적 효과를 노린 장 의원의 노림수라는 생뚱맞은 해석도 흘러나오고 있지만 장 의원의 반발은 선을 넘었다. 잦은 구설로 물의를 빚은 아들 문제와 거친 언사 등으로 장 의원에 대한 대중의 시선은 불편하다. 김병민 국민의힘 최고위원 등 윤핵관들마저 "대통령에 대한 충심이 남아 있다면 보여라"고 압박하는 모양새다. 역대 정권에서도 허주 같은 '킹메이커'나 최형우 전 장관,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 등 정권의 '2인자'는 공신 대우를 받기는커녕 외유에 나서거나 공직을 아예 맡지 않고 무대 뒤로 퇴장했다. 장 의원도 교회에 가서 간증하는 대신 불가(佛家)에서 스님들이 화두로 삼는 '방하착(放下着) 착득거(着得去)'를 곱씹어보는 것이 어떨까. (권력을) 내려놓으면 마음이 편해질 것이다!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didro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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