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호구에서 벗어나는 법

서명수 객원논설위원
서명수 객원논설위원

대구·경북은 '호구'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선거 때마다 '국민의힘' 공천장을 받으면 옥석 가리지 않고 당선시켰다. 김부겸 전 국무총리 등 더불어민주당 간판을 단 후보를 한두 번 당선시킨 적도 있지만 국민의힘에 '몰빵'하는 정치 성향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 민주당만 찍는 광주, 전남·북보다 강도가 떨어진다고 위안하기도 하지만 '도긴개긴'이다. 대구와 광주가 특정 정파의 '호구'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 우리 정치의 현주소다.

호구(虎口)는 원래 '범의 아가리'라는 뜻으로 매우 위태로운 처지나 형편을 이르는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어수룩하여 이용하기 좋은 사람'(국어사전)으로 변용해서 쓰인다.

'민심이 곧 천심'이라지만 우리 편의 잘못에 채찍을 들지 않고 죽으나 사나 찍어 주는 대구와 광주의 민심을 천심이라고 간주하기는 어렵다. 과거 대구·경북에서 '자민련', 광주와 전남·북에서 국민의당이 반짝 성공한 적이 있지만 찻잔 속 미풍에 그쳤다. 그것은 지역 정서가 근본적으로 변화한 것이 아니라 정치권이 두 지역을 호구 취급한 것에 대한 일시적 반발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총선을 코앞에 둔 시점에 정치권의 기류에 큰 변화가 보이지는 않는다. '혁신하겠다'는 인요한 국민의힘 혁신위원장 마저 "낙동강 하류 세력은 뒷전에 서야 한다"며 'TK 호구' 인식을 노골화했다가 '농담'이라며 한발 물러섰다.

대구·경북이 내년 총선에서 정치 혁신의 주 무대로 다시 활용되리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성과 청년 배려 지역구 공천도 대구에서 실험적으로 성사될 가능성이 높다. 21대 총선에서 국민의힘(미래통합당) 후보는 무소속으로 나선 홍준표 대구시장을 제외한 전 지역을 석권했다. 당시 현역 의원 교체율은 대구 41.6%, 경북 75%에 이를 정도로 초토화됐다. '공천=당선'이라는 공식에 홍준표라는 변수만이 작용했다.

그러니 대구·경북 국회의원들이 서울에 상주하면서 중앙당 기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공천에 신경을 쓰는 것은 당연하다. 지역과 나라에 헌신하는 인물이 아니라 공천을 주는 권력자의 눈치만 신경 쓰는 정치인이라도 공천장만 받아 오면 찍어 주는 행태가 바뀌지 않는 한 호구 신세를 면할 길이 없다.

민주당이 참신하고 유능한 후보를 내놓으면 고민이라도 하겠지만 지역 민주당의 사정은 더 심각하다. 김 전 총리 같은 거물급(?)이 '치고 빠지는' 방식으로 간보기 출마해서는 지역 민심을 얻을 수 없다. '대구에 뼈를 묻겠다'고 공언한 유시민은 낙선하자마자 야반도주하듯 짐을 쌌다.

'마이너스 3선'의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도 대구 출마를 염두에 두고 신당 창당에 나서는 등 저울질에 나선 모양이다. 부친의 고향이라는 연고 외에 대구·경북과는 그다지 인연도 애정도 없는 이 전 대표가 신당 간판으로 대구에 출마하더라도 당선권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안동 출마는 사법 리스크를 정면 돌파하겠다는 정치적 승부수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민주당 후보로서는 비교적 높은 29%라는 고향이자 '험지'인 안동에서의 대선 득표율은 인물 대결 구도의 총선에서 판도를 바꿀 수도 있기 때문이다.

TK를 호구로 보는 정치권이 변하지 않는다면 호락호락 찍어 주지는 않겠다는 지역 유권자의 단단한 각오가 필요한 시점이다.

서명수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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