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짜' 극우파로 불리는 하비에르 밀레이(53) 아르헨티나 대통령 당선인이 12월 10일 임기 4년의 대통령에 취임한다. 지난 19일(현지시간) 당선된 밀레이에게 연간 물가상승률 140%대의 극심한 경제난 해결이 최대 현안이다. 국내에서는 머나먼 타국인 탓에 아르헨티나 사정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중앙은행 해체, 신생아·장기매매 합법화' 등 극단적인 공약을 내세운 밀레이가 당선되면서 뒤늦게 관심을 끌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1900년대 무렵 미국보다 1인당 GDP가 높은 세계 5대 경제 부국이었다. 1913년 전후로 세계경제의 1.2%를 점유했고, 캐나다, 호주보다도 소득수준이 높았다. 금 보유량도 5천900만 파운드나 됐고, 같은 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남미 대륙 최초로 지하철이 개통됐다. 유럽에서 아르헨티나로 대거 이민을 갔을 정도였다. 특히 농업대국으로 엄청난 양의 쇠고기와 밀 등을 수출했다. 1차, 2차 세계대전에도 중립을 지키며 안정적인 번영을 구가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목축업 등 농업에 치중한 탓에 1960년대 이후 점차 선진공업국의 발전을 따라갈 수 없게 됐다. 여기에 정치적 혼란까지 더해 중진국으로 전락했다. 지난 40년간 8차례 국가부도를 경험했고, 2020년 들어서 통산 9번째 디폴트를 경험하였다.
◆페론주의 탓에 몰락한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의 경제적 몰락에는 후안 페론의 책임을 부정할 수 없다. 페론주의는 24~25대(1946-1955년), 34대(1973-1974년)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지낸 페론의 철학을 계승하는 정치 운동이다.
군인 출신인 페론 전 대통령은 1946년 대선에 출마해 권력을 잡았다.
▷외국 자본 배제 ▷산업 국유화 ▷복지 확대와 임금 인상을 통한 노동자 수입 증대 등을 경제 정책의 축으로 삼았다. 페론은 국가 주도로 산업화를 추진하면서 민간부문의 역할을 줄였다. 철도·항만 등을 국유화했고 산업은행을 설치했다. 자유무역 대신 보호무역주의를 주창하며 교역을 통제했다.
동시에 노동자의 임금을 크게 올렸다. 47년부터 2년 연속 아르헨티나 노동자 임금은 연 25% 상승했다. 빈곤층이 줄었고, 중산층이 두터워졌다.
하지만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다. 1948년 공공지출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40%를 넘어서며 국가 재정에 부담을 줬다. 생산성 향상이 뒷받침되지 않은 임금 인상은 수출 경쟁력의 발목을 잡았다. 1949년부터 무역 적자가 발생했다. 경기 확장기에 노동자를 지지 기반으로 삼아 인기를 구가한 페론주의는 경기 침체에 접어들며 점차 무너졌다.
1950년대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군부 정권은 페론주의 정치인의 정치 참여를 금지했지만 군사 독재가 종식된 이후 페론주의는 아르헨티나 정치를 지배하는 주요 세력이 됐다.
21세기 들어서는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2003~2007년)이 신페론주의를 내세워 집권에 성공했다. 민영화된 우편 등 공공서비스 기업을 다시 국유화하고 사회보장 등 공공지출을 늘리는 정책을 펼쳤다.
페론주의 정당인 정의당은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의 부인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를 대선 후보로 내세워 2007년부터 8년간 집권 연장에 성공했다. 2015년 대선에서 중도 우파인 마크리 전 대통령에게 임기를 내줬으나 2019년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정권을 되찾았다.
◆32년 만에 최악의 인플레이션
페르난데스 대통령 임기 동안 아르헨티나는 32년 만에 최고 수준의 물가상승률을 기록했다. 극심한 물가상승에 아르헨티나의 대부분의 식당, 상점에선 메뉴판의 가격을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스티커로 표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13일(현지시간) 블룸버그에 따르면 10월 아르헨티나 소비자물가지수는 한 달 새 8.3%나 올랐다. 연간 물가상승률이 142.7%를 찍으며 32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은 올 연말 아르헨티나의 연간 인플레이션이 185%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남미식 좌파 포퓰리즘(페론주의) 정책을 펼쳐온 현 정부의 경제정책이 막대한 물가 급등을 불렀고, 국내총생산(GDP)은 올해 -2%, 내년에는 -1.6% 감소하는 '마이너스(-)' 성장이 우려된다. 물가 급등이 이어지면서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새 옷 한 벌마저 사기 어려워 중고 의류를 매매하는 지경이라고 한다.
10월 물가지수에서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한 부문은 통신비(12.5%), 의류 및 신발(11%). 주택 유지·보수(10.7%), 알코올음료 및 담배(9.8%). 문화·여가(9.3%), 호텔·식당(8.8%) 등이었다.
로이터통신은 은퇴 후 연금과 재봉사 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 아르헨티나인은 급여로 시간당 400페소(공식환율 기준 약 1달러)에 불과한 소득을 얻고 있다고 전했다.
물가 상승률을 따라잡으려면 모든 것을 '오늘 사는 게 제일 싸다'고 한다.
아르헨티나 중앙은행(BCRA)은 지난 10월 기준금리를 15%포인트 인상했다. 기존 118%였던 금리는 133%가 됐다. 이는 30년 새 가장 높은 수치다.
이런 초인플레이션 탓에 아르헨티나 화폐는 '강도도 안 가져가는 돈' 취급을 받았다. 지난해 8월 아르헨티나와 파라과이 국경지대에 있는 엥카르나시온이라는 도시에서 발생한 일이다. 이곳은 국경지대 특성상 두 나라 화폐가 모두 통용된다.
한 파라과이 가게를 침입한 강도는 흉기를 들고 점원을 협박하며 돈을 요구했다. 겁에 질린 점원이 계산대에 있던 아르헨티나 페소를 주자 강도가 "싫다, 싫어. 안 가져가. 아르헨티나 페소 가지고 뭘 하라는 거냐"며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다. 점원은 이런 내용을 인터뷰했고 이 소식은 SNS를 타고 빠르게 퍼져나갔다.
이런 탓에 아르헨티나 페소를 들고 있으면 바보가 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모든 경제주체가 페소 대신 달러 등 안전자산을 보유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실제 아르헨티나 환율은 공식시장과 암시장 사이에 약 2배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 당연히 암시장 환율이 실제에 근접한 환율이다.
살인적인 물가 탓에 4천500만 아르헨티나 인구의 약 40%는 빈곤 상태다. 외화도 바닥나 국제통화기금(IMF)에 440억달러(약 57조원) 규모의 빚까지 갚아야 할 처지다.
◆극우 정치인 당선
좌파 집권당의 페론주의에 반발해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이 '괴짜' 극우파 정치인 밀레이다. 애초 극우 계열 제3 후보였지만 본선에서 집권 여당 후보에 이어 2위였지만 결선에서 역전 드라마를 펼쳤다.
밀레이는 기성정치권에 대한 민심 이반을 등에 업고 혜성처럼 등장했다. 2021년부터 하원의원을 지냈지만 정치적 존재감은 거의 없던 '아웃사이더'에 가까웠다.
그는 당선 확정 된 후 "19세기에 자유경제로 부국이었던 아르헨티나의 잃어버린 번영을 되찾겠다. 점진적인 변화는 없을 것이며 급진적인 변화만이 있을 뿐"이라고 역설했다.
'무정부주의적 자본주의자'를 자처한 밀레이는 아르헨티나 페소화를 달러로 대체하는 달러화 도입, 중앙은행 폐쇄, 장기 매매 허용 등 과격한 공약을 내세우고 있다. 18개인 정부 부처를 최대 8개로 줄인다고 했다.
여러 정책과 언행이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것과 닮았다는 이유로 '아르헨티나의 트럼프'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브라질의 트럼프'로 불리는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과도 이미지가 흡사하다.
밀레이는 입이 매우 거칠다. 아르헨티나 출신 프란치스코 교황을 "망할 공산주의자, 악마, 똥덩어리"라고 불렀고, "사회주의자는 쓰레기, 인간 배설물"이라고 주장했다. 언론 인터뷰에서 부패한 정부가 국민의 돈을 강탈한다고 주장하면서 "국가는 유치원의 소아성애자"라고 했다.
하지만 밀레이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외환보유액이 바닥난 상황에서 자국 통화 폐기 등 극단적인 정책의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에서다. 대선 공약이 오히려 사회적 혼란만 일으킬 거란 전망도 나온다.
정치적 아웃사이더인 탓에 정권을 뒷받침할 세력이 미미하고 정치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도 걱정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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